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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희 한우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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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희 한우대가’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0.02.12 09:06
  • 호수 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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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일하는 사람이 희망이다 <출향인편>
‘우리 아이, 우리 부모님께서 드신다는 마음으로 국산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켜나가겠습니다.’ 이는 한우전문점 ‘한우대가’를 운영하고 있는 이석희(53·대전 유성구 구암동) 대표의 영업 노하우다.
오늘은 자동차 정비기술자에서 농장운영, 현재는 한우전문점 대표로 당당히 생활해 오고 있는 출향인 이석희씨, 그리고 살아오면서 잊혀질 때쯤이면 한번씩 다가왔던 어려움들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든든하게 버팀목이 돼 준 부인 김희순(53)씨를 소개한다.

‘우리 아이, 우리 부모님께서 드신다는 마음으로 국산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켜나가겠습니다.’ 이는 한우전문점 ‘한우대가’를 운영하고 있는 이석희(53·대전 유성구 구암동) 대표의 영업 노하우다.
오늘은 자동차 정비기술자에서 농장운영, 현재는 한우전문점 대표로 당당히 생활해 오고 있는 출향인 이석희씨, 그리고 살아오면서 잊혀질 때쯤이면 한번씩 다가왔던 어려움들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든든하게 버팀목이 돼 준 부인 김희순(53)씨를 소개한다.

농사일 힘들어 상경 결심
이 대표의 어린시절부터 이야기 해본다.
이 대표는 운곡면 후덕리가 고향으로 동갑나기인 이상준·백순기(84)씨 부부의 2남 3녀 중 셋째다. 특히 어머니 백씨는 충남도무형문화재 25호 지정을 받은 춘포 짜기를 3대째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이 대표는 다섯 살 때부터 아홉 살 형들과 어울려 다닐 정도로 말을 잘 했단다. 그 탓에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중학교까지 문제없이 마쳤다.

“같은 학년보다 두살 어리다보니 이것저것 판단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중학교 졸업 후 1년 쉬고 청양농공업고교에 입학했습니다. 밴드부장도 하면서 나름대로 학창시절을 재미있게 보냈어요.”
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 하지만 그는 고교 졸업 후 서울로 도망치듯 떠나게 된다. 농사짓기 싫어서였다는 것이 이유다.
“형님은 학교 다녀오면 공부만 했고 저는 농사일만 해야 했어요. 농사 채가 많아서 였지만, 너무 버거웠어요. 그래서 취직하겠다고 서울로 가 자동차정비학원을 다녔어요.”

정비사에서 농장운영까지
1976년 자동차정비기술자격증 취득 후 그는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운행됐던 그레이하운드 2층 버스회사에 입사 해 2년 동안, 군 제대 후 1981년부터 4년간 대우중공업에서 근무했다.
“열심히 일했고 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아내와 결혼도 했죠. 그러다 일본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잡지에서 1988년 올림픽 때쯤이면 한우 값이 비싸질 것이라는 내용을 봤어요. 순간 5년만 고생하면 돈을 벌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입국 후 바로 아파트를 팔아 2000만원을 가지고 귀농 했어요.”

본가로 돌아온 그는 바로 축사를 짓고 송아지를 구입해 키우기 시작했다.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송아지 한 마리를 구입해 판매하기까지는 최소 12개월 이상 키워야 했는데, 사료 값 인상으로 가진 돈은 바닥나고 결국 축사 운영 9개월 만에 빚만 키워갔던 것이다.
“아버지와는 날마다 싸웠고, 이 모습에 형이 ‘아버지 돌아가시게 할 거냐’고 최후통첩을 했어요. 그 말에 생각할 것도 없이 9개월 만에 포기하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대전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소가 50여 마리 있었는데 이후 매달 5, 6마리씩 팔았죠. 그런데 소를 팔기 시작한 지 6개월 후부터 7, 8만 원짜리가 150만원까지 오르는 거예요. 정말 허탈했죠.”

이후 그는 대전으로 나와 그가 가진 실력으로 금남공업사 정비계장으로 입사했고, 이후 6개월 만에 과장, 2년 만에 공장장으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레이하운드와 대우중공업 근무 시 배웠던 지식과 기술, 맺었던 인맥이 그에게 큰 힘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성과들로 그는 현대기아자동차신탄진정비센터 경영권을 받기에 이르렀다. 1996년이었고 약 2만여 제곱미터 규모였다. 현재도 그가 운영하고 있다.

시련은 있지만 좌절은 ‘NO’
그는 그동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어려운 일도 많았다고 말한다. 특히 한우농장실패에 이어 버스 엔진 구조변경 보급이 물거품이 된 것은 제대로 쓴 맛을 경험한 경우이다.
“버스 연료통을 엘피지로 구조 변경하는 것이었죠. 전 세계를 다니며 기술을 익혔고, 5년을 고생해 완성했어요. 수출만 남았었는데 승인을 받지 못하고 사장됐죠. 특히 5년간 고생한 것이 물거품이 된 것에 좌절할 시간도 없이 신우암 3기, 이어 방광암까지 1년에 암 선고를 두번 받았어요. 지체할 수 없었고, 바로 수술 후 아내와 함께 산으로 휴양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그에게 시련은 많았지만 그 때마다 시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2006년 암 선고 후 2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몸이 호전되면서 또 다른 사업 준비를 시작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무엇으로 갚아야 하나 하다 생각한 것이 한우전문점이었죠. 좋은 재료의 음식을 싸게 공급해 드리고 싶었고, 최선으로 준비해 지난해 4월 문을 열었어요.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셔서 개업식을 4일간 했습니다.”

특히 식당 개업과 동시에 그 동안 이 대표가 겪어왔던 삶의 모습이 엠비씨 ‘이 세상 이야기-아름다운 인생’ 프로그램에 소개됐고, 이후 이들 부부는 유성구의 유명인사가 됐다.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처럼 말이다. 이후 한우전문점은 단골손님들로 항상 북적북적하다.

학교 후배에서 아내로
후배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은 아내 김씨에 대해 이 대표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단 한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란다. 그동안 한번도 못해 본 말이다. 또 잘 자라준 자녀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다.
“가장 힘들었던 때가 경찰대에 다니던 둘째가 구완와사로 5개월여 고생할 때였어요.  이후 별 탈 없이 생활해 줘 정말 감사하죠.”

이 대표 부부는 먼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전시관을 짓고 생활하고 싶은 소망을 전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춘포 짜는 기구며 농기구들이 집안에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용해서다. 또 지금처럼 앞으로도 봉사하면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단다.
농사가 싫어 서울로 도망을 치고 농장이 실패하면서 다시는 고향으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지만, 이 대표는 암 투병 시와 식당 시작 후를 제외하고는 봄부터 가을까지 거의 주말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몸은 시골을 거부하지만 마음은 고향에 가까이 있는 모습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또 그런 모습을 배우며 자랐다’고 말하는 재영(27·을지대학병원 간호사)·재현(25·경찰)씨 등 남매를 두고 열심히 생활하는 이석희 대표와 부인 김희순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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