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5:03 (수)
국제결혼의 빛과 그림자
상태바
국제결혼의 빛과 그림자
  • 박미애 기자
  • 승인 2008.08.04 15:48
  • 호수 76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 국경을 넘어 이웃으로 ②

다문화사회…이방인이 아닌 동반자 만들기

나라는 달라도 가족간의 사랑이 어느 나라인들 덜하고 더할 수 있을까. 다문화 가정 여성들의 보다 바른 이해를 위해 지난 7월초 취재진이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성들의 친정집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는 딸을 향한 그리움에 목이 메 말을 잊지 못했고,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립지만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
레티와인씨(25)는 지난 2006년 2월 비봉면 용천리 이강복씨(41)와 혼인, 9개월 된 딸 민지와 시부모, 시할머니를 모시며 단란한 결혼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의 친정집은 열대과일 리치의 주산지로 유명한 박장성 푸엉케마을로, 이 마을은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도 북쪽으로 2시간 30분을 넘게 달려야 겨우 도착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었다. 한국의 70년대를 연상시킬 만한 시골 마을이었으며, 리치의 주산지라는 말이 와 닿을 정도로 마을 곳곳에는 한창 출하중인 리치가 가득 쌓여져 있었다.

마침 취재진이 도착한 오후에는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된 상태여서 더운 날씨에도 주민들은 선풍기조차 틀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시집 간 딸 소식을 하나라도 더 들을 새라 할머니(히ㆍ76), 아버지(무이ㆍ56), 어머니(보ㆍ57) 등을 비롯한 일가친척 18명이 취재진을 반겼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벽 이곳저곳에 한국 연예인인 장나라와 비의 사진이 걸려있어서 베트남의 한류열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딸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레티와인씨의 어머니 보씨.
제일 먼저 취재진은 한국에서 가져간 딸과 손녀의 사진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 히씨는 “손녀가 많이 커서 너무 예쁘다"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고, 어머니 보씨는 딸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이 곳에서 취재진은 레티와인씨가 한국으로 시집오기 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레티와인씨의 삼촌이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이강복씨를 알게 됐고, 삼촌의 소개를 통해 2005년 초 하노이에서 맞선을 본 후 2005년 말 베트남에서 한번 결혼을 하고 2006년 초 한국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아버지 무이씨는 “우리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잘 사는 나라, 부유한 나라' 등 그 이미지가 아주 좋다. 딸이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에 딸을 보낼 때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어머니 보씨 역시 “딸이 삼촌의 소개를 통해 사위를 만났기에 믿을 만하다고 여겨 결혼을 허락했다"며 “비록 딸을 머나먼 이국땅에 보내게 돼 섭섭하고 그립지만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에 큰 위안이 된다"고 밝혔다. 이어 보씨는 “사위에게 바람이 있다면 그저 딸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어려움 없이 오순도순 잘 살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티와인씨의 동생 미씨(21ㆍ대학생)는 요즘 홀로 한글을 배우는 중이다. 미씨는 “한국에 있는 형부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한 가족임에도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며 “한글을 배우면 제일 먼저 형부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고 밝혔다. 또 미씨는 “제게 한국은 텔레비전을 통해 접한 모습이 전부라서 정말 어떤 나라인지, 어떤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인지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며 “조건만 되면 언제든 한국을 꼭 찾아가고 싶다"고 전했다.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친 후 떠나가는 취재진을 향해 딸이 좋아하는 과일(리치)을 말렸다며 딸에게 꼭 좀 전해달라는 무이씨, 취재진의 손을 꼭 붙잡고 “딸과 사위에게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집에 들르라고 전해 달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보씨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행복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다'
하지만 모든 다문화 여성들의 가정이 이처럼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청양 지역은 아니지만 잘못된 중개업자의 소개로 어려운 삶을 꾸려나가는 한 가정을 소개해 본다.
3년 전 경남 통영으로 시집을 오게 된 부찌터넝씨(21)의 경우다.

베트남 하노이 하이퐁 지역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 신발공장에서 월급 8만원을 받으며 생활하다가 ‘한국에 가면 지금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매달 집으로 돈도 보낼 수 있다'는 결혼중개업자(일명 왕마담)의 소개로 통영으로 시집을 가게 됐다.
당시 남편을 처음 결혼중개업자로부터 소개를 받을 때는 한국에서 집도 몇 채 있고, 시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되고,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들었단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와보니 남편(38)은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맹자였고, 조선업종에 생산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집도 없고,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등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상황에 대해 넝씨는 “알고 있던 모든 사실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참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 상황에서도 넝씨는 좌절하지 않고 매일 시내 김밥 집에 나가 일을 하면서, 세 달에 한번씩 100만원 정도를 친정집에 송금하고 있다.

하지만 넝씨는 “가족들이 가슴 아파 할까봐 이러한 사실들을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았다"며 “부모님을 만나거든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며 울음을 참아냈다.
실제 취재진은 넝씨의 친정집을 찾아갔다. 집 앞에는 음료수 몇 병과 생필품 두세 가지가 전부였지만 가난 속에서도 낯선 이방인을 웃음으로 반겼다. 마치 우리나라 60~70년대 참기름집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집에는 넝씨의 아버지(파ㆍ62)와 어머니(사우ㆍ61), 시집간 두 언니와 형부, 조카 4명, 그리고 남동생 즈엉(17)이 모두 모여 있었다.

넝씨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은 딸이 아는 언니(실제로는 중개업자)의 소개로 한국으로 시집갔다고 알고 있지, 결혼중개로 시집간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됐다.
딸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행여나 일이 생기면 친정집에 바로바로 연락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전혀 없다며 가족들은 그저 한국에서 잘 살고 있다는 딸의 말만 믿고 있었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취재진을 통해 딸이 한국에서 보낸 선물 보따리를 전했을 때 식구들은 함박웃음을 터뜨렸고, 딸의 사진을 건넸을 때는 멀리 있는 딸이 그리워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파씨는 “그저 딸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며느리가 가족 구성원으로 사랑받길 바란다. 그리고 딸이 자주 베트남에 와서 서로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며 딸의 행복만을 기원했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