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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산이 낳고 금강이 길러주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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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산이 낳고 금강이 길러주는 마을
  • 청양신문
  • 승인 2008.05.05 00:00
  • 호수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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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자연마을과 주민숙원사업: 청남면 천내1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전통 이어가는 토박이들
청남면 천내1리(이장 김낙영) 입구에 들어서니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산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양지바른 곳에 잘 다듬은 소나무를 뒤로 하고, 석물을 앞에 세운 산소들이 멀리서도 정돈이 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내1리는 예안 김·진주 소·진주 강·순흥 안·담양 전·칠원 윤씨 등 200여 년 이상 살아온 토박이들이 많아유. 그래서 종산이 많고 음력으로 9월과 10월에 각 문중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어유.”
진주 소씨인 소사영(75) 노인회장은 짧은 역사를 지닌 성씨는 이 마을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는 우스갯소리로 천내1리에 터를 잡고 살아온 이들의 긴 시간을 대신했다. 노인회장이 마을 주산인 거북산을 가리킨다. 그의 설명대로 거북이 등과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 어떤 이가 우리 마을에 와서 거북산을 보고, 학문이 깊은 자손들이 번창할 거라고 말했다고 해유.”
실제로 천내1리에서는 정산향교 전교가 11명 탄생했고, 군내는 물론 중앙의 고위공직 자리에 오른 이가 많다. 소 노인회장은 어찌 그것이 마을의 형세로 다 결정되는 것이겠냐며 자손을 모두 객지로 보내 공부를 시킬만치의 여유가 문중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냐고 설명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낙영(65) 이장은 “다만 젊은이들이 마을에 남아있지 않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세일배 행사 열며 경로사상 이어
“자손들 잘돼서 나가는 것은 좋지만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쓸쓸한 일이지유. 장정들이 대처로 다 나가서 빈집이 여러 채 있고, 자주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집안간이 멀어지는 것 같아유.”
이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다는 마을 사람들은 10여 년 전부터 정초에 세일배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어제가 그믐날이고 오늘 설 쇠고 나면 동네 어른들께 절 올린다는 것이 뿌리가 박혀서 자랐는디 시방은 명절 쇠러 와서 부모님 얼굴보고, 아침 먹고 후딱 가버려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마을 이장이 술 한상 잘 준비하고, 마을회관에 모여 동네 세일배를 시작하게 됐어유. 도시로 나갔던 자식들이 마당에 꽉 찼는디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자손들에게 세배돈을 주는 대신 오히려 우리에게 맛난 거 사드시라고 용돈을 준다며 빙그레 웃는 김완규씨(80)의 얼굴에는 자손들에 대한 자랑이 가득하다.
“우리 어려서 학교가 있을 때도 마을에 서당이 여러 곳 있었어유. 학교서 배우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배웠어유.” 정산향교 전교였던 한 소 노인회장의 말에서 천내1리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만의 전통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석섬지기 땅 ‘셋들’을 아세유?
마을회관이 자리한 샘갈마을 앞으로 잘 갈아놓은 땅이 눈에 들어온다. 이 논이 바로 천내1리의 효자 노릇을 하는 셋들이라 한다.
“한마지기에서 석섬이 나온다고 하여 셋들이라고 불러유. 농사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석섬이면 대단한거지유. 웬만한 데서는 한섬밖에 안나올 때였어유.”
셋들에서 농사를 짓는 김완규씨는 거북산 아래 윗골고랑의 샘이 좋아서 그 물 덕에 셋들 농사를 다 지었다고 한다. 천석꾼이니 몇백꾼이니 하는 집이 몇 집 있을 정도로 부자들이 살았던 마을이었지만 천내1리 사람들도 힘든 살림살이를 피해가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해방되고 그 다음 해 홍수가 나서 온 마을이 물바다가 됐어유. 우리 마을이 농토가 적은 편인데 거기다가 그 땅마저 모두 백사장이 돼버렸어유. 땅이 모두 모래밭이 됐으니 먹고 살기가 막막해졌쥬. 마을 가구수가 지금의 배가 넘었는디 그 때 사람들이 마을을 많이 떠났어유.”
열서너 살 때 물난리가 나서 서른 먹을 때까지 한 15년 동안 살기 팍팍했다는 소 노인회장. 제방공사를 하고 경지정리 사업을 하면서 물길이 물러가고 제법 농사지을 땅이 생겼다.
물이 흘러가는 금강변에 서서 주민들에게 배가 드나들던 이야기를 물었다.
“열살 갓 넘었을 땐가. 저기 나루에 배가 죽 대 있었던 것이 떠오르네유. 공주, 강경으로 통학하는 학생들 실어 나르고, 곡식들 실어 나르던 배가 멀리 군산까지 다녔어유. 전쟁나기 전까지는 더러 배가 다녔는디….”
쉼없이 드나들던 배를 타고 사람들이 떠났지만 정작 자신은 그 물길에 몸을 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김완규씨의 대답이다. 고향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한번도 들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았던 이유에 대해 물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그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조용히 흐르는 물같은 심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 천내1리.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고향을 지키며 살아갈 이들이 있어 오랜 터전을 잘 가꾸어나가리라는 믿음을 뒤로하고 마을을 떠난다.

김홍영 기자  khy@cynews.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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