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5:03 (수)
느티나무 아래서 피어나는 고향별곡
상태바
느티나무 아래서 피어나는 고향별곡
  • 청양신문
  • 승인 2008.04.21 00:00
  • 호수 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양의 자연마을을 가다= 장평면 낙지리

낙지터널 개통 후 청양 가까워진 장평의 관문
“태어나서 여즉까지 살았는데 여기 느티나무만치 좋은데 못봤슈.”
장평면 낙지리(이장 김정현) 원유성(77) 노인회장이 고개를 뒤로 젖혀 손으로 가리키는 느티나무의 연초록 잎사귀가 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만남의 장소로 언제나 삼거리 느티나무로 오라고 말한다. 마을에 일이 있어 사람들이 모일 때도 느티나무다. 한 여름 일손을 잠시 놓고 땀을 식힐 때도 역시 느티나무다.

khy@cynews.co.kr
“청양읍에서 장평가려구 낙지터널 지나면 이 나무가 제일먼저 눈에 들어와유. 장평서 청양갈 때도 그렇구. 화산이나 미당갈 때도 꼭 여기를 지나가거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느티나무를 안볼 수가 없어. 느티나무가 낙지리의 중앙청인 셈이유. 하하.”
노인회 복진문(71) 총무도 170여 년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낙지리의 대명당 자리라고 자랑한다. 여름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음료수를 들고와 쉬었다 가는 이들도 많다. 느티나무는 마을사람 뿐만 아니라 오가는 모든 이들의 쉼터인 셈이다. 느티나무 아래 둘러앉은 주민들도 기자에게 음료수를 권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낙지리는 장평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중심에 있는 마을. 그 중 삼거리는 그 이름처럼 장평, 미당, 화산으로 통하는 길에 있어 오가는 이가 많다.
이제는 중추리로 가는 길을 합쳐 네 갈래 길이 되었고, 낙지터널이 개통되면서 청양과 휠씬 가까워졌다.
“터널이 없어 걸어서 다닐 때 삼거리에서 청양가려면 산날망이로 넘어가야하는데 여기 까치내가 고약한데야. 지금 터널 뚫린 옆으로 길이 있었는데 엄청 고됐지.”
낙지리 사람들은 고약한 고개를 넘기가 힘들어 볼일 보러 부여로 더 많이 다녔다. 이제는 ‘청양 한번 갈 것 두번 가고, 두번 갈 것 서너번 간다’고 한다.
“칠갑산 자락에 있으니 낙지리는 유난히 골이 많아유. 전답도 다른 마을에 비하면 택도 없이 적은 편이고, 있어봐야 손바닥만한 전답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어유.”

표고버섯, 멜론 재배로 앞서가는 마을
농사지어 밥 먹기 어려운 낙지리 살림살이를 보태준 것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예전에는 농사짓는 거 말고 어디가서 일해서 돈벌 데가 있었나. 근디 1970년대까지 화산광산이 있었으니 낙지리 사람들도 광산 혜택 좀 봤지. 광산 일로 생활유지는 했지만 일이 힘들어 그 때는 환갑 넘으면 오래사는 거였어.”
노인회 김수현(75) 부회장은 지금 팔십, 구십먹은 이들은 젊은 시절 그래도 일 고되게 안한 이들이라고 소리내어 웃는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이가 한마디 거든다.

“일 시키는 이들이 장정 아니면 누가 일 시키기라도 했나. 힘깨나 써서 일 잘하는 이나 일했지. 그렇게 사흘 품 팔아서 쌀 한말 사는 것이 집의 큰 양석이었지. 산에서 나무해다 나무장수, 숯장수하러도 많이 갔슈. 지게로 나무지고 한 30리 걸어 부여장에 가서 팔아가지고, 그걸로 생활필수품 사왔지 뭐.”
원유성 노인회장은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부자동네라는 소리 들을만하게 되었다’고 마을 앞으로 보이는 하우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198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농사를 짓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청양서 멜론 제일 처음 시작한 곳이 여기 낙지리유. 장평서 멜론 농사하는 거 여기서 시작된거지. 또 표고버섯 농사도 일찌감치 시작했어유. 처음할 때는 그 가격이 좋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멜론 농사짓는 이들이 줄고 수박을 많이 해유. 표고버섯 도 10여 년전에 가격이 한창 좋았지유. 최고 좋을 때가 지금 가격의 반을 더 받았으니까유. 그때는 표고 농가가 30가구가 넘었어유.”
전국에서도 소문난 이곳 낙지리 조호연씨(58) 표고 하우스에는 견학을 오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도 농수산물 시장에서 장평면 낙지리 조 아무개네 표고하면 알아준다. 조씨는 또 새롭게 하우스 사과를 시작했다. 집에서는 그 나이에 새로운 일을 자꾸 시작해서 일 많아 힘들다고 핀잔이지만  ‘일을 안하면 할 것이 없다’는 것이 평생 밤, 표고농사꾼으로 살아온 그의 대답이다.
“환갑 안된 이는 모두 아이지. 육십 안된 이들이 하우스 농사를 많이 짓는디 우리 마을 젊은이들이 뭐 새로운 거에 도전하는 정신이 있는 거 같아유. 여기 이 사람이 낙지리 살림꾼이지유.” 조씨를 일컫는 말이다. 낙지리에는 조씨처럼 표고버섯, 밤을 비롯하여 수박, 토마토 등 복합영농을 하며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이 낙지리 ‘어르신’들의 칭찬이다.

마을 유래비서 제 올리며 주민 단합
“고향 떠나서 사는 젊은 사람들 설이나 추석 명절에 두 번 오는데 고향와도 부모님 얼굴이나 보고가지 어디 동네 친구며 선배들 만날 시간이 있나요.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서로 사는 이야기라도 하며 살아가자는 뜻으로 고향발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나이 제한 안두고 서로 모여서 객지서 살아가는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동네 유래비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김정현 이장(62)은 15년 전 쯤 만든 고향발전위원회가 한해 두해 해가 더할수록 고향위해 무언가 하자는 뜻으로 유래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 마을의 유래는 알아야하지 않는 생각에서다. 주머니 돈을 털어서 만든 유래비는 또 마을 주민들의 또 다른 구심체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원래 낙지리가 제를 지내던 마을은 아닌데 유래비를 만들면서부터 대동계 하는 날 제사를 지내요.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 올려놓고 절하면서 일년 무탈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고 그것을 계기로 동네사람 모여 단합하자는 뜻이지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마을의 제사가 사라져가는 현실과는 달리 간소하게나마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를 여는 주민들을 보니 남다른 고향 사랑이 전해왔다.
마을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한 주민이 “왜 우리마을은 범죄자 없는 마을로 선정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뜬금없는 말을 한다. 옆에서 “그같은 상이 뭐가 중요하냐며 아무 탈없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냐”며 우문현답을 한다. 그만큼 낙지리 마을은 큰 소리 날만큼 험한 일 없이 조용한 마을이라고 이해되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오랜 시간 고향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넘어가려는지 느티나무 그늘이 길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김홍영 기자  khy@cynews.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