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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와 아이들이 제일 많은 마을이 왕진1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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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와 아이들이 제일 많은 마을이 왕진1리유”
  • 청양신문
  • 승인 2008.04.07 00:00
  • 호수 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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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자연마을을 가다= 청남면 왕진1리
▲ 토마토 수확이 한창인 왕진1리 김영수씨의 비닐하우스.

마을과 사람들  

갈대밭이 하우스단지로 변모…주민소득 늘어
“시방 토마토, 수박 때문에 정신 없는디….”
숨을 몰아쉬며 마을회관에 들어서는 조성민 이장을 보니 마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찾아온 기자의 마음이 미안함으로 가득 찬다. 때가 때인지라 현재 청남면 왕진1리는 토마토, 수박 등 하우스 농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금 여기 젊은 사람들 다 들로 나가부러서 집에 없어유.”
조 이장과 김창환 노인회장, 김경수 대동계장을 따라 하우스로 나갔다. 앞서 가던 이장의 차가 멈춰 선다. 하우스 옆으로 난 농로에 트럭이 한 대 서 있어 차가 지나갈 수 없다. 조 이장이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차 주인을 데리고 나온다.
“하우스 일하느라 죄다 나와 있으니 길이 맨날 막혀유. 하우스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차 빼느라 왔다갔다 하기 일쑤구. 수확하는 날은 더 해유.”
막 수확한 토마토가 상자에 담겨 트럭에 옮겨지고 있었다.

청남면 왕진1리 사람들은 하우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토마토, 수박, 멜론 등 시설하우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제일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소득의 차이였다.
“제방 막기 전에는 들이 얕아서 비가 조금만 와도 잠겨버렸어. 물난리가 심해 밭에 보리ㆍ밀을 많이 심고, 벼농사는 많이 안했으니 먹고 살기 힘들었지.”
현재 창고개마을에 하우스 농사를 짓는 이들이 많은데 같은 면적에 벼농사와 토마토 하우스 농사를 지을 때 소득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토마토의 경우 1동 560제곱미터 크기에서 1회 수확시 평균 800여 만원의 소득을 올리는데 토마토는 연작이 가능하니 소득은 그보다 훨씬 높다는 말이 된다. 벼농사의 경우와 비교하면 소득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젊은이들 열심히 사는 모습 ‘고맙죠’
창고개 주민들 중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50대 초ㆍ중반의 나이를 젊은이라고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마을은 청남에서 젊은 사람이 가장 많은 마을일걸요. 지금도 다른 지역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려고 하지만 집터가 없어서 못 들어올 지경입니다.”
창고개 전체 60가구 중 10여 가구가 50대 초ㆍ중반이라는 조 이장 또한 마을에서는 가장 젊은층에 속한다. ‘젊은이가 많다’는 조 이장의 말은 ‘왕진리가 일가를 이뤄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고 살만한 마을’이라는 말로 들렸다.

젊은 사람이 많으니 또한 아이들이 많다. “다른 마을은 아이들 울음소리 끊긴 지 오래고, 애들 뛰노는 모습 보기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은 어린이들이 청남에서 제일 많은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조 이장은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뛰놀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놨다.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숙원사업을 듣고 있으니 마음의 부담감보다는 왠지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창환 노인회장이 한마디 거든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네들 하는 것 따라줘서 고맙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잘된 건가 봐주고, 고맙지 뭐.”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것을 칭찬하는 김 회장의 말에 조 이장이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일제 ‘쌀 수탈’ 아픔 가진 왕진나루터
왕진1리 제방 둑에 올라서니 멀리 인양리부터 왕진리까지 들어서있는 하우스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 길을 경계로 인양리와 왕진리로 나뉘는데 모두 인양리들이라고 불러유. 지금은 저렇게 하우스가 들어서 있지만 들의 3분지 1이 모두 갈대밭이었슈. 여름이면 물고기를 한 지게씩 잡아서 돌아왔었쥬.”
하우스단지를 쳐다보던 김 회장은 제방이 생기기 이전의 왕진리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여기가 모래땅이라 수박, 참외가 잘돼서 원두막이 많았는데 어려서 형님과 함께 수박을 서리하던 생각이 나네. 수박이 너무 커서 들 수가 없어 모래밭에 굴려서 가지고 오다가 들킬까봐 모래밭에 묻어두곤 했지.”
1930년생인 김 회장 기억에 군 복무를 마친 스물두서너 살 때쯤 마을에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초가집 처마가 닿을까말까 할 정도로 물이 들어왔다.
“제방 둑 쌓기 이전에 왕진리는 물 피해가 심했지. 강가에 서 있는 배의 돛 끝만 보일만큼 물이 들어차곤 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왕진리 사람들은 왕진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수확한 수박과 참외를 팔러 부여장으로 가곤했다. 또한 김 회장은 왕진 나루터가, 이보다 휠씬 이전 청남과 장평의 볏가마를 강경으로 싣고 가던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도 해주었다.

왕진나루터에 이르러 강가를 내려다보니 낡은 배 한척이 모래에 묻혀있다. 더 이상 배가 다니고 있지 않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배가 닿는 곳 바로 옆으로 뒷굽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에 1960년대 초 만든 양수장이 있다. “양수장이 생기고 청남, 장평 일대의 들에 농업용수를 보내면서 여기 사람들 그래도 농사 지을만해졌지.”
양수장 주변을 돌아보던 김경수 대동계장은 멀리까지 이어지는 강줄기 바라보며 “강 건너서 배 띄우라고 소리 지르면 밤에 자고 있다가고 일어나서 사람 태우러 갔다”며 왕진과 부여간 배가 오가던 시절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제는 배가 오가지 않지만 왕진리 사람들에게 이곳 나루터는 그들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청남에서 젊은이가, 어린이가 ‘제일’ 많은 마을이 왕진1리라고 자랑하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김경수 대동계장과 조성민 이장이 마을에 온 손님에게 차 한잔 못 내왔다고 하며 방울토마토 상자를 건넨다. 바쁜 농사철에 시간을 빼앗은 것도 미안한데 건네주는 토마토 상자를 또 염치없이 받아버렸다. 그렇게 받아든 토마토를 함께 둘러앉아 먹은 풋풋한 토마토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왕진1리 사람들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가 담긴 맛이기 때문이기에. 

김홍영 기자 khy@c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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