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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최고 목면 본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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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최고 목면 본의리
  • 청양신문
  • 승인 1990.10.01 00:00
  • 호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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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신선한 자연이 지천으로 널려

계봉사 ․계봉탑․오래된 나무가 있는 정원 등

귀중한 문화제자료…속세를 다 잊을 것 같기만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미걸산이 있고 그 산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맑음과 신선함과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용암폭포가 있으며 어려운 시대를 잘 견딜수 있도록 심신을 길러준 고사찰 계봉사가 산속에 꼭꼭 숨어 있는곳, 그래서 찾아가기도 힘미들었던 곳, 목면 본의리. 조선시대 말엽에는 정산군 목면의 지역으로 본의실, 본의곡이라 하였였다. 구구절절 얘깃거리가 끝이 없이 쏟아져나오는  1구(이장 윤정성, 47)와 청양군의 오지로 정해진 좋을듯한, 맑고 신선한 자연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2구(이장 유병호, 41)로 나뉘어져 있는 본의리는 107가구로 488명이 살아가고 있다.

 

1구의 으뜸되는 미걸산은 고사리가 많다하여 붙은 이름이며, 옛날에 철마가 나왔다고 하여 철마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말봉이라고도 한다. 산중턱에 용바위와 용암폭포, 감투바위, 상절, 중절터외 2개의 절이 있었다하며 정상에는 성터가 있다고 한다. 5년만에 처음 짐작으로 가본다는 이마을 주민 김종문(60)씨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용암폭포는 갈지자형으로 2개의 작은소와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했다는 큰소(지금은 많이 떨어져 있다)를 이루며 10mwjd도 흐르고 있었는데, 50년전만해도 소가 너무 깊어 폭포근처에는 갈수도 없었다 한다.

 

마을안 쌍정자 옆에는 이제 길의 충신정문이 있다. 이제길은 덕흥대원군의 증손으로 자는 이순이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산 독물도에서 싸우다 순국하였으며 숙종43년에 광성군을 증하고 영조5년에 정문을 건립하였다. 절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불당골, 그릇굽는 곳이었다고 하여 점터굴, 미걸산 아래동네 무수동(무술), 중뜸이 1구에 있다. 2구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계봉사는 계봉산에 있으며 산이름은 계봉사로 말미암아 된곳이라고 나와있는 절이 있는데, 전하는말에 의하면 백제 26대 성왕이 지었다고도 하며 조선24대 헌종왕때 소실되어 1920년에 다시 세웠는데 지금은 단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다만 넓은 터와 계봉산 앞 정원에 조형수법이 간략하고도 소박하여 고려시대탑으로 추정되는 계봉탑(문화재자료 147호)이 있어 오랜 역사와 번성했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오래된 나무들로 잘 가꾸어진 정원에 앉아있으면 금새 속세를 다 잊을 것 같기만 하다. 이밖에도 저수지 골짜기에 있는 마을 좀뱅이(조음방리)와 질그릇절, 마을 동쪽에 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다 해서 동막이라 부르다 변해서 된 동맥이가 있다.

 

땅딛고 서서보면 하늘만 보이는 본의리에 사는 사람들, 장마에 엎친벼를 묶다가 출출하면 막걸리 한두잔씩 걸치고 철마산이며 폭포얘기를 하다가 형님이 옳으냐 아우가 옳으냐 가끔씩 싸움이 불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근근히 이어져 내려오는 선조들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옛이야기들이 계속되기를 덕봉재를 넘어 오면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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