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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찬 장군 10주기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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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찬 장군 10주기를 맞아
  • 청양신문
  • 승인 1990.11.01 00:00
  • 호수 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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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덕을 갖춘 청양의 큰별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머리가 명석, 무인의 자질보여

신생 국군 창건과 군요직을 두루거쳐 육군 참모 총장까지

 

한국육군사에 길이 기록될 인물 송요찬장군 군번10056번으로 조선경비대 소위에 임관되면서 신생국군창건과 군요직을 두루거치며 군 최고의 자리인 육군참모총장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업적으로 남겼던 우리고장의 큰별 송요찬 장군의 업적과 그 생애를 밝혀본다.

 

장군은 1918년 음력2월13일 화성면 매산리에서 송달영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머리가 영석하였으며 무인으로서의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기자가 확인한 화성초등학교 6학년 동안의 학업성적은 최상이였고, 3,4,5,6 학년에 우등상을 수상하였으며 신체상황을 6학년에 1백47cm, 40.8kg으로 같은 연령의 타 학생에 비해 10이상 월등이 우수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학업성적을 밝히는 것은 향간에 떠도는 말로 송장군은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고 국민학교도 4,5학년에 중퇴하였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함이며 석두라는 별명도 있으나 그것은 뒤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이러한 우수한 성적과 뛰어난 자질이 있음에도 그는 가정환경이 불우하였다.(유적의 요구로 그 내용은 밝힐수 없음을 양해바람.)그러한 가정환경이 무인의 길로 가게했는지도 모른다.

 

일제말기 일본군에 몸을 담아 비로서 무인이 된 송요찬은 해방이 되자 46년5월 군사 영어학교에 입교, 국군창설의 기간요원이 되었고 군번56번으 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 장군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이후 각급 직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6․25발발시는 이미 육군헌병사령관의 요직에 있어 국군후퇴시 한국은행의 금괴와 현금을 한푼도 손실없이 무사히 후송한 일은 널리 알려진 업적의 하나이다. 6․25동란중 수도사단장, 제8사단장, 제3군단장을 역임하며 중동부전선에서 떨친 그의 위용은 타이거송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잠시 송장군의 당시 참모장이었던 임부택장군의 증언을 들어본다.

 

“송장군은 지․용․덕을 갖춘 장군이었습니다. 총탄이 비오듯 쏟아지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송장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도 수십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생긴 별명이 석두입니다. 송장군의 머리는 돌이라서 총알이 뚫지 못한대서 비롯된 말일 것입니다.”

 

1957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한 송장군은 그해 5월 1군사령관에 피임되면서 그 유명한 박정희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게된다. 그러면 또 잠시 증언을 통해 당시 박정희소장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당시 참모였던 최수근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 박소장은 성격이 꼿꼿하여 상사들이 기피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송장군은 박소장을 참모장으로 지명하여 군내외에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때 송장군은 박장군의 곧은 성품을 높이 사 장차 클사람이라고 여러번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송장군의 인간미를 잘 나타내주는 일화로서 박정희 소장이 7사단장으로 있을당시 사단내에 화재가 발생, 동내의와 방한복이 모두 불타 박소장이 송장군에게 죽는소리로 보고를 하자, 송장군은 “알았어”하면서 전화를 끊고는 휘하부대의 여유분을 모두 걷어 보충하라고 지시하고는 모른체 하였다고 한다.(임부택 장군의 증언). 이렇듯 한번 믿으면 죽을 목숨도 살려줬던 송장군이었다.

 

1959년 2월 군최고권자인 육군참모총장에 피명되었으나 바로 4․19혁명을 맞게 된다. 4․19혁명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현명한 판단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며 현직에 있으면서 3․15부정선거를 감히 규탄하여 총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출국, 미 죠지워싱톤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연구중 1961년 5․16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전폭지지를 보내었으며 박정희장군의 요청으로 귀국, 국가재건 최고회의 기획위원장겸 국방위원장에 피선되고 동시에 국방장관, 내각수반, 외무장관에 연이어 취임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968년 3월에는 자유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옹립되어 세인을 놀라게 하더니 옥중사퇴를 선언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이때 당시의 박대통령과의 인간관계를 알아보려했으나 모두 함구, 말문을 열지 않았다.

 

1971년 4월 예기치 않던 인천제철사장에 취임한다. 이때 세인들은 송장군은 변신이 천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아랑곳하지않고 송장군은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흑자회사로 키워 전문경영인들을 놀라게 했다. 회사의 흑자기반이 다져진 기회를 타 후진에게 물려주고 용퇴하여 경기도 안성에 농막을 세우고 유유자적 노후를 설계하다 신병으로 미국으로 치유차 도미하였으나 미국 병원타향에서 1980년 10월 19일 일생을 마치게 된다.

 

‘타이거송’‘두주불사’‘전쟁에는 강하였으나 정치에는 약하였다’. 많은 일화와 업적을 남긴 송요찬 장군은 자기를 끊임없이 갈고닦아간 지․용․덕을 갖춘 장군으로서 우리청양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장군의 업적과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국군에선 최초의 육군장으로 모셨다. 고인이 된지 10년, 고인이 다니던 학교가 내려다보이는 화성면 광과평리 뒷산에서 자신이 세운 장군교로 지나는 후배들을 지켜보면서 영면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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