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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의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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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의 맥
  • 청양신문
  • 승인 1991.05.09 00:00
  • 호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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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면 농암리, 쟁기 집단제작지

농기계로부터 외면당한 자투리 농토 위해 필요

청양의 농경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징수마을

 

화성면 농암리 징수마을은 집단으로 쟁기를 제작해 청양의 농경문화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던 곳이다. 

옛부터 농경생활을 해온 우리민족에게 농기구는 신체의 일부분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중에서 쟁기는 한해 농사를 짓는데 맨먼저 쓰이는 농사도구로 논과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며 골을 타 김매기를 도와주는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하면서도 긴요해 매우 중요히 여겨왔다.

 

쟁기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따비’라는 것이 있었다. 따비는 소나 말을 이용하지 않고 사람 혼자서 손과 발의 힘을 이용해 풀뿌리를 뽑거나 밭을 가는것이었으며 따비에 성에(쟁기의 몸체부분)를 대어 소나 말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게 쟁기이다.  쟁기는 모양과 쓰임새애 따라 극징이, 홑칭이, 소리, 소비, 논보, 후치, 비연장, 큰보습, 반평 등 밭에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논에 사용할 수 있는 것, 건답용, 고량용 등 토성 토질별로 모양과 구조가 각각 달랐다.

 

또 쟁기는 소의 목에 얹고 끌도록 하는 멍에, 쟁기와 멍에를 연결하는 멍에줄 쟁기대, 손잡이 보삽, 보사과 쟁기대를 연결하는 한마루, 쟁기의 몸체인 성에, 볏, 바닥쇠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습, 볏, 바닷쇠는 주물에 의하여 제작하고 나머지는 나무로 만든다. 쟁기는 두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밭을 갈아 골을 만드는 것, 또하나는 논을 갈아 엎기만 하는 것. 밭을 가는 것은 흙징이라 하여 날이 밋밋한 것이고 논을 가는 쟁기는 날에 굴곡이 있어 흙이 한곳으로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것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개량쟁기이다.  화성 농암리 장수마을에서 만들어 내려오는 쟁기도 이 개량쟁기로 1928년 박흥규(81)씨가 부여에서 쟁기만드는 법을 배워와 이 마을에 퍼뜨려 쟁기 집단 제작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운기, 트랙터 등 좋은 농기계가 많이 보급되고 농경지 정리가 거의 되어 쟁기의 수효가 현저히 줄어들게되자 이 마을에서도 박흥규씨의 3남 박구진(43)씨와 최선기 (47)씨만 그 맥을 이어오고 나머지 농가에서는 쟁기제작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시한(동짓달, 섣달)부터 나무를 준비하여 만들게 되는 쟁기는 대패 등 사용되는 연장이 30여가지에 이르며 하루종일 2~3개 정도를 만들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쟁기를 2월그믐(음력)부터 예산, 대천, 광천, 홍성, 부여 멀게는 안면도장까지 내다 팔았다고 한다. 50여년전만해도 1년에 평균 4백여개의 쟁기를 만들었으나 본격적인 기계화 영농이 시작되고부터는 1백여개 밖에 만들지 못하고 있다 한다.

 

농업 인구가 많고 농사를 잘짓고 못짓고에 따라 산업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시절과 함께 이제 논갈이, 밭갈이, 골타기 등 1년동안 움직여야했던 쟁기는 경운기, 트랙터에 밀려 서서히 우리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러한 쟁기의 사라짐이 문명의 발달과 함께 기계화 영농문인데 아무리 농업기계가 발달한다해도 산간지역인 우리지역에서는 기계화 영농이 어려워 쟁기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그래서 수지는 안맞지만 더러 찾는 사람들이 있어 그만두지 못한다는, 18세때부터 쟁기를 만들어왔다는 박창규 할아버지. 그는 농기계가 고도로 발달했어도 그 문명의 농기계들로부터 외면당한, 경지정리가 안된 골짜기, 논, 수렁논, 경사가 심한밭 등 이땅의 자투리 농토를 위해 오늘도대팻날을 들어 소중한 쟁기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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