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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신문
  • 승인 199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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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면 서정리
정산군 소재지로 역사 깊고 유물 많아 소도시형태 띤 9개면중 가장 큰 마을
서정리 9층석탑(보물제18호), 정산향교, 자오교, 봉서정, 백연지, 동헌·객사터, 비선거리의 선정비들, 정산3·1만세운동등 유물과유적지가 많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온 역사깊은 마을 정산면 서정리. 서정리를 찾아가는 10월 5일은 면 중에서 가장 유일하게 장이 서는 정산장날로 장터가 북적거렸다. 타장이 다 폐쇠되었어도 정산장만 유독 존재해 오고 있음은 정산, 장평, 청남,목면 등 4개면의 생활근거지로 청양의 곡식 절반을 차지할 것 정도로 큰 곡식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정산장이라고 하지 않고 읍내장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선시대 정산군 읍 소재지였을때 유래된 것이며 이 장터에서 기미년에는 3·1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한곳이다. 정산군 서정리는 백제때 열기현 신라때 열성현으로 부여에 딸린 정산현이었고 조선시대 말엽에 정산군 읍내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구아대, 물안이, 산직리, 향교골, 옥거리의 일부를 합하여 서정리라 하였다.
조선시대 정산군 소재지로 마을이 무척 컸지만 지금도 군내에서는 청양읍 읍내리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마을로 오랜 문화와 전통이 뿌리내렸으며 그로 연관되어 보수성 또한 강한 지역이기도 하다. 1구(이장 임용대)는 향교골, 윗말, 재작거리(저자거리), 옥거리, 장터, 과디(구아대), 서정자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3백여 세대에 1천80여명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구(이장 장인규)는 물안이 산직말등으로 41세대에 1백60여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자연부락유래를 살펴보면 향교골은 향교가 있다 하여, 윗말(의성주택 근방)은 서정리의 위쪽, 재작거리는 구장터로 저자거리가 변해서 된 동네이며 옥거리(녹야, 농협아래)는 옛날 정산현이 있을때 옥이 있었던 마을이라 옥거리라 부른다. 장터는 지금의 정산장터를 말하며 과디는 서정리에서 가장 큰마을로 구아대가 변해서 된 지명으로 역사가 3백여년은 될 것이다. 구아대는 옛날 관청이었던 곳으로 지금도 역대 정산면장들이 그 동네에 살고 있다고 한다. 구아대 들어가는 입구를 비선거리라 하는데 이 비선거리에는 석비와 철비, 마애비가 있고 자오교의 유허비가 있다. 자오교는 정산장터에서 청남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다리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유허비에「호서열성녹야 자오교」와 강희 43년(1704)12월에 놓은 다리라고 새겨져 있다. 원래 돌다리였지만 1969년 시멘트로 개축하였으며 그 석재는 민가와 국교운동장에서 좌대로 쓰이고 있어 뜻있는 주민들은 복원을 염원하고 있다.
비선거리에 있는 현감엄인술선정비(1581-1586)는 4백여년이 넘는 군내 최고의 석비로 현재는 정산면사무소 앞으로 옮겨졌고 1912년에 세운 읍내면장 박진표 송덕불망비는 군내 유일한 철비이고 바위에 비를 직접 새긴 마애비는 3-4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공사관계로 바위를 절개 1개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방치되어 있어 주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마애비 또한군내 유일한 것이지만 비의 글씨가 인공적으로 파손되어 있다 (비선거리 선정비에 관하여는 다음기회에 자세히 기록할 계획).
서정리라는 지명이 붙게된 서정자라는 마을은 강단수라고 부르는 큰 느티나무가 있어 이는시경에 나오는 감당수의 변한말로 식영정이라 했는데 서경자에서 서정자로 변한 이름이다.
이 서정자 마을에는 예전에 여러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밑에서는 노인, 중년, 여성,청년층의 4군데로 나뉘어 시국을 논하고 동네소식을 전하며 여론재판소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지금은 한그루만 남아있고 여름에는 지나가는 사람 너나할것없이 쉬었다가는 곳이기도 하다. 2구는 물안이와 산직말이 있는데 물안이는 지명 그대로 천장호수의 물길이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으며 산직말은 산직이가 살았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서정리는 유적지가 많은곳이다.널리알려진 9층석압외에 동헌·객사터, 백연지, 만향정터, 경사루터, 정아루, 사직단, 봉서정, 법연사등이 있다. 동헌터는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이고 객사터는 정산중학교 자리, 백연지는 면사무소안에 있는 연못으로 그 역사가 4백년이 넘었으며 조선 선조21년(1588)에 정산현감 송남수가 이곳에 연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 하여 지명이 붙었으며 사계 김장생도 이곳 현감으로 있을 때 가꾼 연못으로 유래가 깊다. 현재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며 이 백연지에는 만향정이라는 누각이 있었다 한다.
이역시 송남수가 연못을 만들 때 함께 지었다 하는데 지금은 터만 있다. 또 면사무소앞에는 영조때 현감 조발이 사계선생의 청렴결백한 행실을 경모하여 지은 누각인 경사루가 있었다 하는데 역시 터만 있다. 정아루는 향교에 딸린 누각으로 도내에서도 드물며 향교전성기때 많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지금도 고색창연하게 남아있고 향교에서는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동안 충효교실을 운영해 오고 있다. 오동산 아래에 있던 사직단은 농사를 잘 짓게 도와달라고 정산현감이 주재하여 제를 올리던 곳이었고 봉서정 역시 오동산에 있는 정자로 1930년 정산면내 유지들의 모임인 번영회에서 세운 것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정산면내가 다 보여 그곳에 있는 법연사와 더불어 주민들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런데 20여년전 정부소속이었던 오동산이 개인소유로 넘어가면서 소유주가 나무 한그로 베어내지 못하게 하고있어 주민들은 봉수정을 보수 유적지로 보존하고 싶어하나 손대지 못하고 있고 법연사 또한 신도가 많았던 큰절이었으나 역시 보수를 못해 쇠퇴해 가고 있다.
서정리는 다른 마을처럼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아니라 상권이 많이 있고 인근에 농공단지가 있어 소도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숙원사업도 소도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시장 재정비, 도로망확충, 소방도로개설, 서정천 복개로 주차문제 해결등 정산면의 사업과 같다.
생활권이 농업과 상업으로 나뉨에도 불구하고 단합이 잘되고 젊은이들은 봉사정신이 강하다. 부녀회, 청년회 활동이 잘되고 애경사시에는 모두 참여하며 노인들게 매년 경노잔치나 효도관광을 보내드리고 있다. 면소재지 마을답게 홍성인·영기부자와 장수덕씨등 역대 정산면장을 배출했으며 건국대 강희정교수, 국세청에 근무한 김영한씨, 사업가 최창호 이중호시도 이마을 출신이고 연세당한의원을 경영하며 고향을 지키는 두릉 윤홍수선생은 향토사학가로 군내의 향토사학에는 권위가 있으며 한시에도 능통 도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기도 했다. 정산 4개면의 중심지인 서정리. 오랜역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철비, 최초의 마애비등과 서정리 9층석탑, 향교대성전등 잘알려진 문화재등이 많은 곳으로 깊은 역사와
발전을 거듭해 앞으로 청양읍과 더불어 예전의 ‘읍내’라는 명칭을 되찾을 날이 멀지 않으리라.〈김명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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