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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의맥 37, 두릉윤성과 두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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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의맥 37, 두릉윤성과 두솔성
  • 청양신문
  • 승인 1994.04.01 00:00
  • 호수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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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모의 복국운동 벌인 곳
두릉윤성과 두솔성 역사적 기록 미흡
두릉윤성·두솔성 발굴과 사적지 지정 시급
청양지역에는 백제때의 성이우산성을 비롯 두릉윤성, 두솔성, 지곡리 토성 등 여러 곳이 있으며 이중 정산면 백곡리의 두릉윤성과 칠갑산내 두솔성은 백제부흥군의 최후 항쟁터로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위치의 의견이 엇갈리고 잇어 바른 시일내 역사적 사실이 바르게 기록되어야 한다. 두릉윤성과 같이 백제부흥군의 항쟁터인 예산의 임존성 (대흥면 소재)은 지역향토사학가들이나 학계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여 역사적 사실을 입증, 역사학계의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청양의 두릉윤성(혹은 두솔성)은 백제복국운동을 벌인 최대의 격전지였으나 군내역사기록 외에는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 극히 드물다. 청양은 당시 백제의 북방 방어선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와 지리상 최인접지역으로 백제는 사비성의 멸망 후 복국운동이 자체적으로 일어난 지역으로 백제의 명맥을 어느 기간동안 이어왔다. 두릉윤서(두릉성, 윤성) 등을 중심으로 청양지역의 백제시대 북방측은 5∼6개의 성곽을 중심으로 백제유민들이 항전하게 된 것이다.

두솔성-백제부흥운동 도모, 두릉윤성-신라군과 한달 엿새동안 격전
삼국사기에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였다는 흔적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문헌들이 나온다. △백제 의자왕 20년(서기 660년)에 유인원과 유인궤 등은 복신의 군사를 웅진 동쪽에서 격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사정의 책을 격파하고 많은 군사를 죽이고 포로로 하였고 군사를 나누어 준둔케 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8년(서기 661년) 3월 5일 중로에 이르러 품일은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두양윤성 남쪽으로 가서 진을 살피게 했다. 3월 25일 대군은 고사비성 밖에 진을 치면서 두양윤성을 공격했으나 한달 엿새가 되도록 성을 빼앗지 못했다. △신라본기 문무왕 3년(서기 663년)에 보면 백제의 여러 성에 숨어있던 무리들이 은밀히 회복을 도모하여 거사는 두솔성에 의거하고 왜병에 원병을 하였다. 이에 대왕은 친히 유신, 인문, 천존, 죽지 등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하고자 길을 떠나 웅진으로 가서 진수 유인원의 군사와 합류하여 8월 13일에 두솔성에 이르러 보니 백제군은 이미 왜군과 더불어 진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 대목은 삼국사기에서 가장 주목할 사항으로 신라 문무왕 3년(서기 663년)에 왕이 김유신 등 28명(혹은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여 두릉윤성, 주류성 등 모든 성을 쳐서 함락하자 부여풍은 도망가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러나 지수신만은 임존성(예산 대흥소재)에 의거 항복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문헌을 정리해 보면 661년 두양윤성에서 신라와 백제부흥군이 한달 엿새동안 격전을 벌였지만 뺏지 못하고 그로부터 2년후 663년 신라문무왕이 김유신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두릉윤성을 함락시켰다고 나와있다. 또 두솔성에서 부흥군들이 거사를 도모하였다고 나와있다.

지역향토사가들 두솔성을 부흥항쟁터로 지목
여기에 나오는 두릉윤성과 두솔성의 위치는 후에 만들어진 대동지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두릉윤성은 지금의 정산면 백곡리에 있는 瑗봉막? 두솔성은 칠갑산 내에 있는 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릉윤성은 정산면 백곡리 계봉산 정상에 축조된 석충산성으로 성의 둘레가 560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계봉산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2백척 안에서 하나의 우물과 군창이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우물의 경우 지금도 정방형의 형태로 있어 물이 나오고 있다. 또 두릉윤성 아래 지곡리 토성(백곡리 토성)에서 발견된 삼족토기장 등 유물들이 백제때의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때의 성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한편 칠갑산 내에 있는 두솔성(자비성, 도솔성)을 살펴보면 칠갑산 정상에서 남동쪽과 남서쪽 능성을 따라 축조, 둘레가 4.5㎞의 토성과 석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산성은 충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으로 모양은 삼각형에 가깝다. 두솔성 내에는 1만5천여평의 도림사지와 도림사 3층석탑(유형문화재27호)이 있다. 도림사는 남향절로 특이하게 조선중기무렵 소실되고 현재는 삼층석탑과 석등 주춧졸 등의 조각만 남아있다. 돋꼇瑩熾?도림사 3층석탑 주변에는 염부처 석등파편, 주석, 기단석, 부처좌대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화강석으로 된 장방형 석축과 같은 귀중한 유적이 있다. 두릉윤성과 두솔성을 놓고 볼 때 지역향토사가들은 36일동안 백제인이 부흥운동을 벌인곳은 두솔성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에 「백제의 여러성이 몰래 부흥을 도모, 그 우두머리가 두솔성에 운거하여…」라는 대목이 있고 두릉윤성에는 작은 우물밖에 없으나 두솔성은 계곡의 물이 풍부해 장기적 싸움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칠갑산은 561m로 두릉윤성의 210m보다 2배이상 높고 성의 둘레가 넓어 여러성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며 칠갑산에서 임존성(백제 부흥운동의 마지막 항전지)에 이르는 능선 70리의 퇴각로가 있어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주장은 두솔성내에서 여러 성곽과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백제시대의 유물로 추정할만한 것은 없고 성곽의 막다짐 축조방식이 연대기 추정에 없기 때문에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빠른 시일내에 백제인이 나라복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 외세와 항전했던 곳이 굴별?두솔성이 같은 지명이라면 그 지역이 정산면 백곡리인지 칠갑산내인지 정립되어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두릉윤성, 두솔성 군민모두가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예산의 임존성은 예산 사람들이나 사학계에서 보물처럼 여기고 사적지로 지정, 매년 성 주변의 풀을 깎는 등 정비작업과 성 축조와 관련된 전설의 묘순이 바위에 제를 지내오고 있으나 두릉윤성은 향토사학가들 외에는 지역민들은 잘 알지못하고 있으며 관리도 허술하다. 또 같은 부흥운동을 벌였던 주류성의 경우 전북 부안에서 그곳 지역에 있다고 전북에서 발행하는 모든 지지에 소개되고 학술토론 등을 열자 홍성에서는 홍성 내포설을 주장, 홍성군 학산성을 주류성으로 지목, 주류성 찾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주류성 찾기에 두릉윤성, 두솔성의 우리지역에서도 향토사학가들이나 군민 모두 두릉윤성을 아끼고 바로잡아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참고 : 향토연구 10호/충남향토연구회 펴냄) <김명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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