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5:03 (수)
칠갑의 맥
상태바
칠갑의 맥
  • 청양신문
  • 승인 1994.05.11 00:00
  • 호수 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양의 열녀들
<38>한 지역의 역사기록 중 인물편을 보면 충신 열사 효자는 잘 알려져 있지만 집안의 가문을 위해 살았던 열녀들은 잘 아려져 있지 않다. 오직 자신의 집안과 남편을 위해 살다 남편이 사망하면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죽거나 홀로 남아 집안의 살림과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던 열녀들. 그녀들도 충신 열사 효자 못지 않게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당당한 한 몫을 했던 인물들이다. 청양의 대표적인 열녀는 면천복씨, 김해김씨, 전주이씨(대치면), 송현헌·옥배(정산면), 대구서씨(화성면), 능성주씨(운곡면), 칠원윤씨, 과산김씨(청남면), 성산배씨, 전주이씨, 칠원윤씨(목면)등으로 현재 각 지역에 열려문 열려비 열려각 등이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열녀거의가 절절 또는 자결을 하던 관습에 따라 병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한 인물들이다. 인물별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송현헌
송현헌은 우암 송시열선생의 5대손으로 대덕군 회덕에서 성장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정숙한 여인으로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혼인 때가 되가 정산면 광생리 홍한표의 넷째아들 홍성원에게 시집을 가 넉넉하지 못한 시댁살림을 위해 길쌈을 하는 등 밤낮으로 노력, 홍씨집안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부모가 모두 병석에 눕고 송씨는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 드렸으나 허사였으며 병구완으로 집안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끼니도 없을 정도였다. 풀뿌리 나무껍질로 면을 이으면서 약을 구하려 다녔고 그들 부부가 실신한 사이에 부모가 돌아가시자 동네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송씨는 장례 하루만에 깨어나 통곡하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남편을 위해 약초를 캐다 먹였으나 그대로 죽자 그녀 또한 조용히 누워있다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948년 도효열 표창회에서 열녀비를 정산면 광생리 마을 입구에 세웠다.

◆면천 복씨
대치면 농소리 복병채의 장녀로 태어난 복씨는 어려서부터 책임감이 강해 혼인 전에도 가정 일을 쉴새없이 도왔다. 손재주가 좋아 열살 때부터 수를 놓고 열다섯에는 두루마기 도포 등 어려운 옷도 손수 지어 부모가 입고 다녀 마을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열일곱살 되던해 농소리 한민수에게 시집가 이튿날부터 시댁일에 열중하였는데 시집온지 3년만에 그의 남편이 기동을 못하게 되어 밤낮으로 간호를 하고 정한수를 떠놓고 천신께 빌기도 하였다. 이웃사람들이 가르쳐주는 약을 구하려 다녔고 어떻하든 남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수개월만에 죽게되었다. 그러자 복씨또한 아내는 남편이 죽으면 산송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 남편의 허리끈을 풀어 목매 자결하였으며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1922년 조선 공도회에서 열녀표창을 하고 정문을 농소리에 세웠으며 한씨문중에서 받들고 있다.

◆옥배
정산땅 칠갑산 아래에 정병이윤과 그의 아내 옥배가 살았는데 정병이란 직업으로는 넉넉한 살림을 할 수 없어 그의 처 옥배가 철마다 산에서 나는 나물, 약초 등을 구해 살림에 보태며 살았다. 어느 날도 약초를 캐러 산에 가서 많은 약초를 캐고 난 후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옆 바위틈에서 호랑이 새끼 서너 마리가 나와 그 중 한 마리를 안아 자신의 점심인 보리개떡을 먹였고 한 동안 새끼들과 놀다 돌아왔다. 옥배는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산에서 겪은 일을 얘기하자, 놀라며 산에 가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이튿날 남편이 출근을 하면서 신신당부하여 산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약초 말리는 일을 하였다. 그날 낮에 우연히 보니 어미호랑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이웃집사람이 보고 호랑이 나타났다고 고함치자 동네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가자 도망쳤다. 그 날밤 밤이 깊도록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다 깜박 잠이 든 옥배가 이상한 생각에 깨어보니 호랑이가 남편을 물고 도망가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남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죽을힘을 다해 싸우게 되었다. 한참을 실갱이하다 나무몽둥이로 호랑이의 머리를 내리치자 호랑이가 남편을 놓고 도망갔다. 이렇게 해서 짐승의 위험으로부터 남편의 목숨을 구한 옥배의 용감성이 알려져 정산 서정리에 정문이 세워졌으나 지금은 없다.

◆대구 서씨
대구 서시는 영의정 조두순(화성면 용당리에 묘가 있음)의 처로 남편이 죽자(1865년) 장례를 마치고 가사를 정리한 후 자손들에게 남편의 인물됨을 후대에 이을것과 가문의 번창을 부탁하고 자결하였다. 이에 고종이 숭고한 죽음과 대구 서씨의 높은 뜻을 빛내기 위해 열녀문을 내렸으며 현재 화성면 용당리에 있다.

◆전주 이씨·김해 김씨
대치면 인물들로 이씨는 이조참의 박신규의 아내로 남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자 정성을 다해 간호했고 남편이 병사하자 3일간 식음을 전폐남편을 따라 죽어 고종 7년(1870)에 고려박씨 문중에서 열녀문을 건립 대치면 장곡리에 있다. 김해 김씨는 이중복의 처로 역시 병든 남편을 지성으로 구안하다 죽은 같은 날 자결, 1885년 열녀정문을 건립, 대치면 수석리에 있다.

◆능성 주씨
조선시대 인물 김현배의 후처로 남편이 병을 얻어 눕자 조석으로 봉양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자 자결하였으며 1894년 유림에서 열녀문을 건립, 운곡 모곡리에 있다.

◆칠원 윤씨·광산 김씨
청남면 인물로 칠원윤씨부인은 김홍선의 처로 24세에 남편이 병을 앓자 단을 만들어 매일 밤 기도를 하고 뱀을 손수 잡아 약을 해주는 등 5년간 지성을 다했으나 세상을 뜨자 그날 밤 자정 우물에 투신 자결하여 1942년 유림에서 천내리에 열녀비를 건립하였다. 광산 김씨부인은 1873년 김서현의 장녀로 태어나 16세때 동강리에 사는 윤종석에게 출가 1년이 넘도록 후손이 없이 남편이 죽자 자결하려다 시부모의 만류로 3년상을 치루고 친정에 다니러 가게 되었다. 친정에서 개가 시키려해 밤길 50리를 달려 시댁 앞에서 기절하였으며 하루만에 깨어나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하여 동강리에 열녀비를 세웠다.

◆전주 이씨·성산 배씨·효부 윤씨
모두 목면 사람으로 전주 이씨는 윤인수의 처로 친가의 가훈을 이어받아 출가 후 남편이 병에 눕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시부의 병환 시에도 정성을 다하였으며 남편이 죽자 청상수절하여 삼덕을 수행하여 유림에서 1899년에 신흥리에 효열문을 건립하였다. 성산 배씨 윤희국의 처로 6년간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나 남편이 죽자 자결 정절을 지켰고 유림 및 각 단체장들이 1965년 신흥리에 열녀비를 건립하였다. 효부 윤씨는 전린순의 처로 남편이 무단 술가 후 8년만에 중풍환자로 돌아왔으나 지성으로 섬기며 간호하였고 보람도 없이 죽자 33세의 젊은나이에 근검절약 남편 병간호로 팔았던 종산과 전답을 되찾아 가문을 일으켰다. 1963년 대평리에 효부비를 건립하였다. <김명숙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