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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안종일 청양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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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안종일 청양문화원장
  • 청양신문
  • 승인 2000.12.02 00:00
  • 호수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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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조적한 별치창’
화성면 광평리(창리)

조선시대에 쌀을 팔고 쌀을 사들여서 어려울 때에 구호용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별치장(別置倉)을 만들고 여기에다 각종 곡물을 모아 쌓아놓고 운영했던 곳이 있어 오늘날까지도 마을 지명이 유래가 창말(倉里)이라고 전해오고 있음을 알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청양군 화성면 광평리에 창말이란 자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왕조 영조대왕 때에 조적(환곡의 출납·곡식을 팔고 사는 일)제를 시작하여 정조대왕 때에 이 제도를 시행했던 별치창은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일종의 구휼정책이었다.
이 별치창에다 다음과 같은 곡물을 쌓아 놓고 이 사업을 실시했다.
진색미(賑色未=구호용쌀), 전미(田未=밭벼를 지은쌀), 미(未=쌀), 태(太=콩), 정조(正組=벼), 목맥(木麥=메밀), 피모(皮牟=겉보리), 진맥(眞麥=밀) 등을 이 창고에 보관하면서 구호용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별치창고가 있기 때문에 마을 지명을 비롯 인근 마을 들녁과 보(洑)의 명칭까지도 연관성 있는 명칭으로 오늘날까지 불려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창말(倉里), 창들, 창다리보(洑), 창아보, 창뻘, 창말내(倉里川) 등으로 이름하고 있고 이웃 지명은 벌뜸, 산밑이, 팔구정(八九亭), 너분들(廣坪), 황새알(鶴村) 윗골로 불려지고 있다.
1914년도에 법정리를 광평리(廣坪里)라 했다.
이렇듯 자연지리적으로도 이 창말 동네는 화성면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오서산(烏棲山)에서 흐르는 물과 백월산(白月山)에서 흐르는 물, 구봉산(九峰山)에서 각각 흐르는 물이 모두 이곳 창말 앞에서 만나 장장 무한천(無限川)을 이루고 아산만으로 흐르고 있어 창말동네는 화성면의 중심지가 되어 별치장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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