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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기고 - 송암 김 영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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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기고 - 송암 김 영 석
  • 청양신문
  • 승인 2000.10.30 00:00
  • 호수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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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향 갈마골의 앞날은 밝다’
(57. 대전시 서구 가장동 세진기업(주) 근무. 비봉면 강정리 두산에서 출생. 가남초(10회)·청양중(14회) 졸업.)

우리가 태어난 곳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다.
강촌 냇가와 정자나무가 어울린다고 해서 붙여진 강정리(江亭里)란 마을에는 몇 개의 자연부락들로 형성돼 있는데 그중 하나의 이름이 ‘두산(斗山)’이다.
두산이란 두뫼산골의 약자로써, 이곳엔 또다시 자개울과 큰말, 그리고 말미로 이어지는 세 개의 자연부락이 합쳐진 마을의 공통이름이다.
이 자연부락들은 비봉산(飛鳳山)을 주산(主山)으로 한 법공산(法孔山)이 좌우에 날개를 드리우고, 우백호(右白虎)의 기슭기쪽에 ‘자개울’이란 작은 마을을 감싸 안고, 좌청룡(左靑龍)의 기슭기쪽 중심으로 ‘큰말’이란 마을을 탄생시켰으며 좌청룡 날줄기와 우백호 날줄기가 오그라들어 만날 듯한 곳에, ‘말미’라고 하는 또하나의 자연부락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안산(案山)격인 말미뒤산 너머로 무한천(無旱川)의 상류인 강촌 냇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의 진산(眞山)인 법공산의 정상에서 바라다보면, 법공산의 기저(基低)밑에 ‘큰말’을 중심축으로 놓고 좌우로 길게 뻗은 두날개의 품안으로 ‘자개울’과 ‘말미’라는 자연부락을 폭 싸안고 있으며, 강촌 냇물을 말미뒷산으로 막아 놓은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약간 틀어 넓은 곡창지대인 구레안 들과 갯들 쪽으로 마을의 문을 열고 있다.
자연의 조화로 볼 때, 매우 살기좋은 삶의 터전으로 인식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이야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지만 옛날에는 관심들이 컸다고 한다.
또한 자개울과 큰말 사이에 또하나의 자그만 산줄기를 뻗어 내려 크고 작은 마을의 뒷동산을 세개나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저수지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이들이 뭉쳐진 혈과 지형을 보고 여러가지 풍수적 해석들을 내놓아 그것들이 사실인양 구전(口傳)되어 지금까지도 여러가지의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산세(山勢)나 지형(地形)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세개의 자연부락 중 가장 적고 가장 꼭대기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마을이 자개울이다.
‘자기울’이란 스스로자(自)자와 개울(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이란 말이 합성된 마을의 이름으로 개울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산골짜기의 첫 마을임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크고 중앙에 위치한 마을을 ‘큰말’로 불러왔는데 이는 ‘큰마을’의 약자가 아닌지 또는 ‘마을’의 어원(語原)이 혹시 ‘말’이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아울러 법공산 날줄기 끝자락에 위치한 ‘말미’란 동네는 ‘마을’을 의미하는 ‘말’과 꼬리미(尾)자가 합성된 마을의 이름으로 자연부락의 끝동네임을 뜻하고 있다.
이들 동네마을의 이름들은 옛날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왔기에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자연 친화적 이름들이라 부르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쉬워 오래오래 머리속에 남아 있다고들 한다.
이곳 두뫼산골에 마을이 형성된 역사를 따져보면, 약 일천오백년쯤 거슬러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들 이름들이 혹시나 통일신라 시대 때 사용하였던 ‘이두문자’가 구전된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이들 이름들이 뜻글자인 한자의 훈이나 음 또는 순수한 우리말이 합성된 글자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 굳이 어문학적으로 따져 보지 않더라도 이두문자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그 어감이 토착적이여서 듣기도 좋고 정이 많이 간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들이여서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다.
이름 자체가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이와 함께 이곳 마을의 이름을 ‘갈망골’ 또는 ‘갈마골’이란 이름도 함께 병행해서 불러오고 있는데 그 뜻 또한 다양하다.
아주 먼 예날에 이곳 산골짜기에 갈씨(葛氏)란 문중이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어느 해 갑자기 망해버려 이 고을을 등지고 떠났기에 외지인들이 이곳을 갈씨네가 망한 동네란 이름으로 그렇게 불러왔다는 얘기다.
이곳의 지형을 풍수(風水)로 풀어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 또는 갈마형국(渴摩形局)으로 보고 마을이름을 갈마골(渴馬谷)또는 갈라곡(渴 摩谷)으로 불러오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갈마음수형국이란 목마른 말이 이곳에 들어와 충분한 물을 마시며 쉬는 형국으로 풍성한 이곳 물산(物産)에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며 놀 수 있는 명당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도 편케 살 수 있는 마을이란 얘기다.
이들이 말하는 지형을 보면 법공산 날줄기 하나가 ‘큰말’주변의 오른쪽으로 쭉 뻗어 내려오다가 고개를 빼고 갑자기 멈추어선 듯한 뒷동산이 말 모양을 닮았고, 그 앞에 큰 저수지가 있으며, 우백호 날줄기가 서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언덕배기 위에 말마루(말들이 뛰어 노는 장소) 형국이 있고 그옆 골짜기에 이들이 먹을 ‘가룰초원’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는 지형들을 보고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이와 비슷한 해석으로 마을의 지세를 갈마형국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갈마형국이란 자손이나 선비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나 스승님들을 위해 묘비와 공덕비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갈고 닦으며 돌보는 형국이여서, 이곳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 가운데 효자, 효부들이 많이 나오고 스승님을 우러러 뵙고 따르는 선비들도 많이 나와서, 이곳 마을에 인접한 강촌 냇가와 마을한 가운데에 서 있는 정자나무 그늘아래 모여들어 시서화(詩書畵)를 즐겼기에, 자식들의 효행이나 선비들의 곧은 행실이 널리 주변에 알려졌으며, 강학(講學)하는 소리와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마을 산속을 찌렁찌렁하게 울렸었다는 얘기들도 구전돼 내려오고 있으나, 그 진부(眞否)는 가릴 길이 없다.
이처럼 우리 동네 마을의 이름들이 일천오백여년의 마을역사를 가지고 내려오면서 얻어진 이름들이지만, 그런 것들을 충분히 고증할 만한 증거들이 거의가 마멸돼 가고 있는 작금의 상태하에서는 이들을 장황하게 떠든다는 것은 더더욱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들이여서 그냥 스쳐버릴 수도 있다 하겠으나 마을의 역사에 대한 사실들은 그렇지가 않다.
과거에 있던 물증들이 세월을 따라 하나둘씩 없어져버려 점점 더 멀리 우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기에 이런 것들을 밝혀낼 물증들은 확실하지 않지만, 심증이 가고 있는 흔적들이 여기 저기에 산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심증의 하나로 이곳 인근의 야산에 원시고려장터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매우 거칠고 튼튼한 석실의 고려장터가 발견되고 있기에 이곳 마을의 형성 시기를 신라말로 보는 하나의 심증이요, 마을의 이름 자체가 ‘이두’에서 나왔다고 보는 또 하나의 심증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렸을 적만해도 이곳에서 마을 공동체의 ‘정자나무제(亭木祭)’를 지냈었다.
썩은 고목나무 둘레가 장정들의 품으로 세발반 정도의 크기였으니 정자나무의 수명을 최소한 일천년 이상으로 볼 때 이곳 마을의 형성시기를 약 일천오백년 전쯤으로 보아도 별 이의가 없을 게다.
마을 사람들은 죽어 썩은 이곳 정자나무 주위를 석축으로 쌓아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들 석축 틈사이로 삐져나온 새끼정자 나무가 커서 그 당시 어른들의 품으로 두발반이 넘었었다.
그 정자나무가 오래전에 죽어 썩어버린 고목나무의 대를 이어, 동네마을 사람들에게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 일들을 협의하고 농사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외지의 소식을 전해주고, 이곳의 소식들을 종합해 외지로 알려주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음을 나도 목격한 바여서, 정자나무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정신적 신목(神木)이 돼왔던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곳 동네 마을의 대소사(大小事)는 물론 애호사(哀好事)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이곳을 중심으로 해결하고 처리해 왔기에, 산증인이 됨직도 하지만 말이 안 통하니, 증거물이나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또한 이곳 마을안에는 큰부자들이 살던 기와집들이 다섯채나 있었는데, 그들이 폐허가 돼 헐려 버렸거나 타지로 뜯어간 자리가 남아있고, 그들 기와집 주변의 마당가에 서있던 호두나무와 감나무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봄이나 여름철 그들의 그늘밑에서 어른들이나 어린 우리들이 묵상에 잠기거나 더위를 피하던 놀이터가 됐었다.
거기다 가을이면 탐스럽게 익어가는 과일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듬뿍듬뿍 제공해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던 과실수 고목들의 모습에서 이곳 사람들의 경제적 여유와 시골 놀이문화를 어느 정도는 엿 볼 수 있는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보지는 못했지만 정자나무 옆에 자그마만 정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바로 앞에 위치한 갈마저수지와 저수지 뚝 수구막이 숲을 바라보며, 또한 바로 뒷산인 법공산 너머로 떠오르는 달의 모습이나 주변의 경치를 음미하며, 고목이 된 정자나무와 은빛모래 반짝이는 수구막이 밖 강촌 냇가의 운치를 떠올리며, 은은한 거문고 가락에 밤낮으로 밤낮으로 시서(詩書)를 읊어댔던 관객(官客)이나 선비들이 들끓었다는데 그 정자의 흔적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했다.
그 자리 위에서 가끔씩 이 마을 노인네들의 대금 소리와 퉁소 소리가 혼합돼, 여름밤 은하수를 타고 메아리쳐 울려퍼지는 애달픈 그 소리를 듣고 감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에 많은 눈물을 글썽거린 적도 있었다.
또한 큰말의 인가 주변에 효자비문을 보호하던 자그만 전각이 두채나 있었는데, 썩고 허물어졌던 것들을 새롭게 보수해 관리하고 있었으나, 그 위치를 동네사람들이 임의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 놓더니, 그것마저도 없어져 버린 듯, 그 잔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법공산 밑마을 뒷산에는 정승을 지낸 사람의 묘와 묘비, 그에 대한 공적비들이 있었지만, 그들 또한 관리가 부실해서 숲속의 풀섶에 방치돼 마모되고 있기에 그 또한 초라하기가 그지없다.
옛날 내가 어렸을 적만해도 그 묘지들을 관리하고 돌보던 산지기들이 서너 집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후손들이 관리를 한다고 하나, 그 관리의 손길이 허술하다 보니 옛날의 그 위세를 찾아 볼 길이 없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세월따라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면서 구전돼 내려왔던 전설같은 얘기들이, 아직도 그 근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야 할 유적지 주변엔 잡초나 잡목만이 우거지는 폐허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니,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내 마음 또한 공허하고 착찹하기 그지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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