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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향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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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향유정
  • 청양신문
  • 승인 1995.09.07 00:00
  • 호수 1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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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충남도경 정보과> 윤 승 원
지난 일요일엔 고향에 다녀왔다. 장모님이 고추를 따 놨으니 가져가라고 해서 우리 내외는 염치없게도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늘 하던대로 용돈 몇푼 드렸더니 이번엔 극구 사양하신다. 고추값을 받는 것 같아서 싫다고 뿌리치셨다. 그래도 그냥 돌아설 수 없어서 고기나 사 드시라고 손에 지폐 몇장 쥐어 드리고 왔지만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칠십 노인이 객지에 사는 자식을 생각하며 이 고추를 마련했을 것이다. 말씀이 아니더라도 값을 쳐서 받을 양이면 시장에 내다 파셨을 것이다. 고추가 어떤 작물인가. 농약을 하지 않으면 성한 것 하나 건질 수 없는게 고추다. 그런걸 농약 한번 안하고 이만큼 소득하여 주신걸 생각하니 그 사랑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어쨌든, 노인의 건강이 아직은 그만하시니 다행이다. 자식따라 도회지로 나가 살지않고 혼자 시골에 남으신지 십여년이 넘었다. 노인 혼자 외롭게 사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대단한 고집이라고 한다. 혹자는 자식이 불효를 한다고도 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농사체를 두고 어떻게 떠나느냐고 자신을 대변해 오셨다.

이제 생각하니 그게 현명하신 판단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농사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시골생활을 고집하신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이런 경우, 병환이라도 나면 병원에 모시고 갈 사람이 가까이 있어야 하고, 객지의 자식은 어른의 불편함이 없는지 수시로 안부를 여쭤어야 하며, 그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틈나는 대로 자주 찾아 뵈야 한다는 조건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죄스러운 생각이지만,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께서도 시골에서 계속 사셨더라면 좀더 건강한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식들이 시골에 계신 노인 고생하시는 것 못보겠다고 도회지로 모신 것이 결과적으로 천수(天壽)를 단축시켜 드린 건 아닌지.....,
당시의 여건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되돌아 보면 자식으로서 후회스런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시골에서 흙 냄새 맡고 사시던 노인이 도회지로 나오면 신상은 편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 자식이 아무리 신경을 써 준다해도 노인에게 밀려오는 적막감을 막아 드릴 순 없다. 시골에서는 바깥 마루(사랑채에 딸린 마루)에 나가 앉아 있기만 해도 오가는 이가 모두 말동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삭막한 도회지의 공간에서는 시골 노인과 벗해 줄 사람도, 참견할 소일거리도, 마땅치 않은 것이다. 풀을 뽑고 싶고, 흙내가 그리워지고, 가축의 울음소리 한번 듣고 싶다고 말씀하실 땐 이미 의술(醫術)로 고칠 수 없는 향수병(鄕愁病)이 깊어졌다고 자식들은 진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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