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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의병장 행적 왜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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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의병장 행적 왜곡됐다”
  • 김명숙
  • 승인 2002.06.24 00:00
  • 호수 4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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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선생 학술강연회서 박성수 교수 주장
병오 홍주의병의 민종식 의병장이 홍주성 탈환후 다시 무너질때 정예부대를 이끌고 도주했다는 기록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일 홍주문예회관에서 열린 6월의 독립운동가 민종식 선생 공훈선양 학술 강연회에서 ‘의병장 민종식의 항일투쟁’이라는 주제 강연을 맡았던 박성수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에 의하면 “잘못기록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며 “민종식 의병장은 탈환한 홍주성이 다시 왜군에 의해 무차별하게 점령당하면서 의병의 대오가 흩어지고 어깨위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포수 안덕인에 의해 피신하게 됐으며 그뒤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고 동지들과 만나 재기할 계책을 세우고 전북 무주 적성산에서 장기전을 펼치기로 했으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당시의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들이 지방에서 들려오는 소문만 믿고 민종식 의병장이 도망갔다고 보도하면서 역사가 왜곡됐다”고 발표했다.

그로인해 전남 구례에 은거하고 있던 매천 황현(1855~1910)까지 대한매일신보의 오보를 믿고 “민종식 대장은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도주하였으나 홍주 10리안의 밀과 보리밭이 모두 짓밟혀 뭉개졌다”고 잘못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더욱 잘못된 것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홍주의사총의 비문(단기 4292년 7월, 서기 1959년 9월)에도 민종식 의병장이 “어찌 할바를 몰라 하다가 죽엄을 면하려 한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인보 선생은 이글을 쓰기 9년전인 6·25때 납북된 분이며 이후 최근에 세운 번역비문에는 다시 비문 집필연대를 1949년으로 고쳐 쓰고 있어 고의적인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다.

또 병오홍주전투를 왜곡한 장본인은 일제라면서 홍주성을 공격하는데 있어 퇴각로를 만들어 주기위해 한쪽문을 열어 놓아 마치 인도적인 작전을 쓴 것처럼 했으나 사실은 성문을 모두 봉쇄, 홍주의병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1천여명을 몰살시켰다는 것.

이런 기록은 해암사록에 홍주성에 입성한 의병이 5천여명이라고 했으나 일본측 기록은 500명으로 되어있고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일본측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며 역사왜곡은 민족의 수치이므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학술강연회를 시작하기 전에 가진 기념식에서는 민종식 의병장 손자인 민선기, 중기(서울)씨에게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패와 영구보존용 태극기를 증정했으며 후손들은 행사후 병오홍주의병 격전지였던 화성 모둠내와 광시, 민종식 의병장 생가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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