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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의병장 6월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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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의병장 6월의 독립운동가
  • 김명숙
  • 승인 2002.06.10 00:00
  • 호수 4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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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홍주의병장, 전답 팔아 의병봉기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민종식 홍주의병장이 국가보훈처가 정한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됐다.

1861년 3월 경기도 여주에서 명성황후 일가로 태어난 선생은 이조참판 등 탄탄대로의 관료생활을 보내다 명성황후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정산면 천장리로 낙향하였다.

민종식 선생은 천장리에서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 부심 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기 위해 의병봉기를 계획했다.

천장리 집에서 의병훈련을 시키고 전답을 팔아 무기를 구입하고 1906년 3월 화성의 안병찬, 임한주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의 의병부대를 편성 병오홍주의병을 주도하였다.

일본이 점령한 홍주성을 쳤으나 실패하고 공주 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화성면 합천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가 그해 5월 홍산에서 재봉기하면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천읍, 남포읍성 등을 장악한 뒤 5월 19일 1천여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화포를 앞세워 홍주 장날 홍주성을 공격, 홍주성을 탈환해 10여일간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31일 새벽 결국 일본군에게 홍주성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에도 선생은 정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으고 예산에 살던 처남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재차 의병봉기를 도모하였으나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주로 피신했다가 11월 20일 붙잡혔다.

1907년 7월 교수형을 받았지만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었고 그해 12월 융희황제의 즉위기념 특사로 풀려났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도 의기를 꺾지 않다가 1917년 6월 26일 56세로 일생을 마쳤다.

1962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정산면 천장리에는 선생이 살던 고택과 유허비가 있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관련자료와 사진을 이달 한달간 전시하고 있으며 오는 20일 오후 2시 홍주문화회관(홍성군 홍성읍)에서 민종식 의병장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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