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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을밤에 읽는 동화 –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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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을밤에 읽는 동화 – 관계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11.27 00:23
  • 호수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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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톡. 갈참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 캄캄해. 너무 무서워….” 도토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바로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도토리야, 걱정하지 마. 지금부터 우리가 너를 지켜 줄게.” 누구일까? 도토리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봄여름 동안 도토리와 함께 갈참나무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의 목소리였어요. 언제부터인가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이 보이지 않더니, 어느새 낙엽이 되어 도토리보다 먼저 땅에 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야, 춥지?” “응, 조금.” “기다려 봐. 우리가 이불이 되어 줄게.” 낙엽들이 도토리를 둘러쌌습니다. 도토리는 마치 귀여운 아기 같았습니다. 도토리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나뭇잎들은 사나운 비바람을 막아 주었지요. 그리고 이제는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포근히 껴안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도토리는 가슴이 찡해져서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습니다. 

“나도 이 껍질 밖으로 나가 너희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어.” 도토리는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 껍질은 벽이 아니라 너의 한 부분이야.” 도토리와 낙엽들의 말소리로 가을 산이 부스럭부스럭거렸습니다. 

톡, 톡톡. 또 다른 도토리들이 나무에서 떨어졌습니다. 톡톡토독, 토토토토토토톡토토토토톡톡톡토토토토톡톡토토톡. 갑자기 소나기 빗방울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도토리들이 마구 떨어져 내렸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장대를 휘두르며 갈참나무를 털어 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할아버지는 떨어진 도토리들을 주워 자루에 담았습니다. 낙엽들은 몸을 납작하게 숙여서, 도토리를 숨겨 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자루는 바람을 불어 넣은 것처럼 금세 빵빵해졌지요.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찍, 찍찍. 날이 어두워지자 쥐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녔어요. 찍찍찌찌찌찌직찍찍찍찌직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 낙엽들은 도토리를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도토리도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서, 쥐들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도토리의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숨어 살아야 하지?” 도토리가 갑갑해하며 말했습니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마을로 가거나, 쥐들의 먹이가 되는 게 낫겠어.” “안 돼, 도토리야, 너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그래야 우리도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너와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거야. 그게 우리들의 꿈이야.” “관계?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야.”

“내가 어떡하면 너희 낙엽들을 도울 수 있니?” “네가 살아남아서 갈참나무로 다시 태어나면 돼. 그게 우리를 돕는 일이야.” 도토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내가 갈참나무로 태어난다고? 어떻게?” “놀라지 마, 도토리야. 네 몸속에는 이미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도토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 몸속에 갈참나무가?’ 도토리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토리의 작은 몸속에 어떻게 커다란 갈참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일까요?

겨울이 되었습니다. 한 송이, 두 송이,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갈참나무 가지 위에도 흰 눈이 쌓였습니다. 도토리를 감싸고 있는 낙엽 위에도 눈이 쌓이고 또 쌓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차가운 눈이 쌓일수록 도토리의 몸은 점점 더 포근해지는 것이었어요. 자꾸만 잠이 왔습니다.
도토리는 오래오래 편히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꿈도 꾸었습니다.

낙엽 위에 쌓였던 눈이 사르륵사르륵 녹는 소리가 났습니다. 눈을 떠 보니, 도토리의 몸도 눈 녹은 물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도토리 주위는 낙엽들이 썩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낙엽들이 썩어가는데,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니!’ 도토리는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꿈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야, 도토리야. 넌 지금 큰일을 하는 중이야. 네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걸. 우리는 정말 행복하단다.” 낙엽들이 도토리를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도토리의 작은 몸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온몸이 터질 듯이 아팠습니다. 도토리는 눈을 꽉 감아 버렸습니다.

“힘들지? 이제 조금만 참으면 돼.” 이미 썩은 낙엽도, 부서져서 가루가 된 낙엽도 마지막 힘을 다해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도토리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 도토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한 껍질을 찢으며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거든요. 도토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꿈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햇빛이 환하게 숲속을 골고루 비추고 있었습니다. 도토리는 햇빛이 내려오는 쪽으로 손을 힘껏 뻗었습니다. 그랬더니 도토리의 손끝에 연초록 싹이 돋아났습니다. 너무나 예쁜 새싹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낙엽들이 말한 거로구나.’ 도토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새로 돋아난 새싹에 이슬이 반짝거렸습니다. 숲속에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수없이 많은 어린 갈참나무들이 출렁거렸습니다.
    -안도현의 글 「관계」 전문입니다.  

‘관계’, 도토리와 나뭇잎의 관계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많은 관계 중 누구에게라도, 나뭇잎이나 도토리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나 생각합니다. 가을이 깊은 숲, 푹푹 쌓인 낙엽 속에서 연둣빛 잎이 나풀거립니다. 갈참나무입니다. 예쁘고 대견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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