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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온몸으로 쓰다 – 시인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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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온몸으로 쓰다 – 시인 김수영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11.22 11:35
  • 호수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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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먼 곳으로부터/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조용한 봄에서부터/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여자에게서부터/여자에게로//능금꽃으로부터/능금꽃으로…//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전문  

명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시 낭송을 하고, 담배갑 뚜껑에 메모를 하던 김수영은 술을 마실수록 눈이 더 커지고 입이 커졌습니다. 11월 27일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픈, 아팠던 시인 김수영 탄생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먼 곳’과 ‘조용한 봄’, ‘여자’와 ‘능금꽃’과 김수영을 생각합니다. 

자유, 혁명, 설움, 비애, 돈, 사랑…, 고독한 자유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라고, 깊고 큰 눈의 김수영은 말합니다.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이며, 상처와 결함의 인간이 지닌 무한의 에너지이자 능력인 사랑이야말로 시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절규하는 시, 온몸으로 쓰는 시, 자유와 혁명과 인류를 위해 쓴 시는 여전히 절실하고 울림을 줍니다. 
 

문예지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시인이 된 김수영은, ‘아메리카타임지’와 ‘공자(孔子)의 생활난’으로 5인(김경린·박인환·임호권·양병식·김수영)의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며 모더니스트(현대적인 감각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로 출발하였습니다. 4·19혁명을 거치며 본격적인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씁니다. 1950년대 시단의 중심이던 청록파와 생명파에 대한 반동이지요. 현실과 혁명, 사회변화와 민주주의, 자유에 관심과 열망을 드러냈습니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그리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도록 만족할 줄 안다.” 일상어를 적극적으로 쓴 시인, ‘시를 안다는 것’을 가장 큰 재산으로 알고,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습니다. 시에 대해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 간다고 김수영은 말합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말합니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시를 짓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온몸의 시학을 말했습니다. 

눈처럼, 폭포처럼, 팽이처럼, 고독하게 양심의 자유를 거침없이 부르짖었던 자유주의자.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침을 뱉은 자유인 김수영에게, 시는 고상한 예술이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양심의 산물이었습니다. 한국언론의 자유를 부르짖은 시 ‘김일성 만세’를 몇몇 신문사에 보냈지만, 발표되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맹목적성을 비판하고,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였습니다. 바람과 먼지와 풀에게,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행할지를 매번 고쳐 물었습니다. 

페미니즘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2015년 이후, 많은 여성 독자가 김수영의 시를 더 이상 읽지 않겠다고 시집 불매운동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아니 그보다도 먼저/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는 시 ‘죄와 벌’은 여성비하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수영은 아내와의 삶을 많은 시로 썼습니다. 아내 호칭을 ‘너’에서, 호콩 마마콩 무더기 같은 ‘동반자’로, 자본주의에 맞선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적’으로, 그리고는 고난을 함께한 ‘동지’로, 어쩌면 격하게 고단했던 생활을 함께해 준 아내를 김수영 본인으로 여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족적이면서도 서민적이고, 사치스러운 감각과 섬세한 정서였지만 전투적이기도 했던 김수영은, 서울 태생이었지만 서울 사람인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남들이 귀하게 여기며 갖춰 놓기를 즐기는 것들, 책장과 책상, 식탁 등의 집안 살림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올 때는 돌이나 도끼로 찍어 버리겠다며 달려들기도 하였습니다. 돌과 도끼로 쳐부수려 했던 가구를 봅니다. 시를 쓸 때는 동쪽, 수필은 북쪽, 번역일을 할 때는 남쪽을 향해 앉았다는 커다란 책상입니다. 그래도 아이들한테만큼은 텔레비전과 피아노를 사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잠이 든 뒤에도 발을 빨아 주곤 하던 아빠였습니다.

젊은 날에 한 때는 연극으로, 미8군 수송관의 통역관으로, 모교의 영어교사로, 신문사의 문화부장으로, 그리고는 양계업을 하면서 번역과 평론 등을 쓴 전문작가로, 무한한 자유를 외치고 사랑의 세계를 꿈꿨습니다. 
전쟁통의 극한 상황에 몰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살았던, 김수영의 부인은 말합니다. “(남편이)그릇이 컸어요. 재결합한 뒤에 한 번도 내가 다른 남자와 살았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요.”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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