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딱, 딱따구리 소리가 숲을 더 맑게 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자 딱따그르르 딱따그르르 나무 사이로, 숲으로 새 소리가 흩어집니다. 초록이 짙던 숲도 서서히 옅어집니다.
여름이 갑니다. 여름 내내 흰 꽃을 피웠던 백당나무와 덜꿩나무는 이미 빨간 열매로 새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채 꽃을 피우지 못했던 숲속의 식물들도 부지런히 작은 꽃잎을 펼칩니다. 몇몇의 앙증맞은 자주색 꽃들은 여름이 사라져 가는 숲을 보라색으로 물들입니다. 망토를 걸친 모습이기도 하고 아랫입술을 쭉 내민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지없이 종족 번식을 위한 묘책으로, 벌이나 나비를 끌기 위해 헛꽃을 쓰기도 합니다. 몸 전체로 향기를 풍기기도 하지만, 향기가 전혀 없기도 합니다.
서늘한 그늘을 좋아하는 그늘돌쩌귀, 꽃이 투구 모양이라서 이름 붙여진 ‘투구꽃’입니다. 투구를 쓴 로마 병정의 모습이라고도 하지만, 고깔을 쓴 아기 같기도 하고 새의 부리 같기도 합니다. 높은 곳을 좋아하여, 산마루나 산기슭의 위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양지보다는 음지, 숲의 그늘에서 잘 자랍니다. 그런 성질로 햇볕을 많이 받으면 오히려 꽃이 피지 않습니다. 서너 조각으로 갈라지는 초록잎은 날카로워 보이며, 잎 마디마다 꽃이 핍니다. 보라색 꽃잎은 꽃을 받쳐주는 꽃받침입니다. 2장의 진짜 꽃잎을 투구 같은 윗꽃받침 속에 숨긴 채, 꽃받침이 천연스레 꽃잎이 되었습니다.
투구꽃은 뿌리에 강한 독성이 있습니다. 한방에서는 이 뿌리를 ‘초오’라 하며 약재로 사용합니다. 예전에는 뿌리의 독을 화살촉에 묻혀 독화살을 만들고 창에 묻혀, 짐승을 사냥할 때 사용하여 ‘사망’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늑대를 쫓는 힘이 있어 ‘늑대풀’이라고도 하였지요. 조선시대에는 사약의 재료로도 사용하였습니다. 독이 많은 만큼 몸에 이로운 성분도 많습니다. 조금씩만 먹으면 보약으로 으뜸이지만, 많은 양을 먹게 되면 사약으로도 으뜸이랍니다. 우리나라 전국에서 자라며, 세뿔투구꽃은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잎을 손으로 훑어 냄새를 맡아보면 누릿한 냄새가 납니다. ‘누리장나무’입니다. 냄새가 고약하다 해서 구릿대나무라고도 부릅니다. 개나무, 노나무, 깨타리 라고도 부르지요. 별별 산야초에 관심이 많은 한 친구는 어린 시절에 먹었던 영양제 ‘원기소’ 냄새라고 합니다.
종 모양의 꽃부리에서 나오는 암술과 수술은, 뭔 수술이 이렇게나 긴가 할 정도로 아주 깁니다. 스스로 동글동글 말리거나, 다른 꽃의 수술들과 엉기기도 합니다. 벌이나 나비가 꽃을 찾아온다기보다, 수술들이 곤충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꽃받침에 붉은 자주색열매가 맺혔습니다.
산속에 웬 깨나무? 깻잎 모양의 작은 잎이 달린 이 풀은 이름만 불러도 입안이 화~해 지는 박하, ‘산박하’입니다. 향이 펑펑 퍼질 것 같은 꽃을 보려고 몸을 낮췄습니다. 작은 꽃은 파란빛을 띤 보라색입니다. 시원하고 상큼한 박하의 향을 실컷 맡아보려 한 욕심에 보란 듯이, 향을 찾기 어렵습니다. 풋풋한 초록 냄새, 산박하는 향이 없었습니다. 깻잎나물, 깻잎오리방풀이란 이름도 있습니다. 꽃이 피고 진 자리, 종 모양의 옅은 보랏빛 꽃받침도 예쁩니다.
단풍보다 먼저, 향기로 가을을 맞이하는 꽃 ‘꽃향유’입니다. 꽃향유의 짙은 보라색 꽃은 양지바른 산자락의 억새와 잘 어울립니다. 습기 많고 햇볕이 잘 드는 산과 들의 이곳저곳에서 그윽한 향기를 풍깁니다. 잎의 뒷면에는 분비작용을 하는 샘(선점)이 있어, 그곳에서 강한 향기가 나옵니다. 정작 꽃에서 향이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잎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꽃은 줄기의 위쪽과 가지 끝에서 한쪽으로만 빽빽하게 치우쳐서 핍니다. 꿀벌에게 꿀을 제공하는 밀원식물로 꽃향유 주변에는 늘 윙윙거리는 벌이 많습니다. 향료와 향기로운 기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산에는 보라색 꽃들이 많습니다. 고독의 파랑과 정열의 빨강이 겹친 색 보라는 고귀하고 우아합니다. 화려하고 풍부함 속에 고독과 추함과 외로움과 슬픔 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예로부터 ‘왕실의 색’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품위 있어 고상한 보라의 숲, 깊은 느낌을 주는 푸른 기운의 보라의 산이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곧 멀어질 것입니다.
산처럼 계절처럼 인생도 보라의 시간이 있겠고, 있었겠지요. 좋은 생각으로 뿌렸던 봄날의 씨가 좋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꽃향유와 산박하와 투구꽃, 백당나무와 덜꿩나무와 누린장나무의 빛나는 열매들이 칠갑산 자락을 붉고 보란색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