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3:35 (목)
왜냐구? 돈 되니께 혔지 – ‘갈대 후리기’
상태바
왜냐구? 돈 되니께 혔지 – ‘갈대 후리기’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10.12 14:31
  • 호수 14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헤어 허어엉 허어엉 허어야/허 허이 허어에야 헤/해가 지고 달이 뜬다//일락서산은 저 달이 뜨고요, 월출 동녘에 저 달이 솟네//이팔 청춘 소년네들아/백발을 보고 웃지를 말어라, 만사가 허사로다/아가 딸아 방 씰어라, 남포 손님 오신다더라/~’-인양리 노동요 ‘갈대 후리는 소리’ 앞소리 부분

일을 즐겁게 하고자, 공동체 의식을 높여서 일의 능률도 높이고자,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동요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 자유로운 행동으로 일을 하며 부르는 민요로 농사를 지으며 부르는 농업노동요, 고기를 잡으며 부르는 어업노동요, 상여 등을 메고 나갈 때 부르는 운반노동요, 부녀자들이 길쌈을 하며 부르는 길쌈노동요, 땅 다지기나 말뚝박기 등 달구질 따위를 할 때 부르는 토목노동요 등이 있습니다. 일이 힘들기는 하여도, 함께 호흡을 맞추며 흥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선조들의 여유로운 마음이었습니다. 

청남면 인양리 마을에는,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약 200여 년간 내려오는 노동요가 있습니다. 금강이 흐르는 금강변에 위치한 마을에서만 있었던 노동으로, 서천과 부여와 공주 등에서도 있었던 갈대를 베는 일이었지만, 힘든 일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른 곳은 인양리 마을뿐이었습니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인양리의 향토민요 ‘갈대 후리는 소리’는, 갈대를 긴 낫으로 휘둘러 베며 노동의 고됨을 잊으려 부른 노래였습니다. 1965년경 인양리 금강변에 제방을 쌓아 갈대밭이 줄어들면서 ‘갈대 후리기’와 노랫소리는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1960년대까지 성행했던 달대 후리기, 인양리에서는 이삭이 패지 않은 갈대를 ‘달대’라 하였습니다. 후린다는 말은 ‘휘둘러서 깎거나 베다’라는 뜻입니다. 
제방이 쌓기 전, 인양리 마을 앞들은 대부분 뻘밭으로 달밭(달대를 후릴 수 있는 갈대밭)이 약 24만 평으로 참으로 넓었습니다. 갈대밭에는 먹을 수 있는 올맹이 등이 자랐으나 수확량이 적고 작업이 힘겨워 큰 소득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달대는 땔감으로 유용했으며, 더구나 외지인에게 팔면 돈이 되었지요.  

벼농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달대 2짐 12다발의 가격은 장정 하루 품삯 정도였습니다. 달대밭은 개인 소유의 농사였으며, 마을 장정들에게는 돈벌이 판이었습니다. 장정 혼자서 보통 하루에 300~400평을 벨 수 있었으며, 매년 장정 800여 명이 달대를 후렸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장정들은 1일 노동으로 돈을 벌고, 달밭 주인들은 달대를 팔아 돈을 벌었습니다. 달대는 음력 7월 하순부터 벼 베기 전까지 주로 농한기에 후리는데, 이 시기에는 농사일이 없어 농부들이 노는 시기였으므로 매우 중요한 소득원이었습니다. 
  

달대 후리기는 힘든 일입니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긴 낫을 들고 금강변의 갈대밭으로 들어가 온 힘을 다해 휘둘러야 합니다. 갈대밭 한 줄 왕복을 후리고 나서는 한참을 쉬면서 낫을 갑니다. 2명이 한 조가 되어 달대에 낫질을 하는데, 낫의 무게를 이용하여 낫 날이 45도 정도 위를 향하게 후리는 것이 요령이지요. 베어진 달대는 쓰러진 채로 말립니다. 일노래는 언제나 부르는 것은 아니고, 일에 여유가 있을 때 나오는 소리(노래)로, 앞소리꾼이 선창을 하면 남은 일꾼들이 후렴을 하는 것이지요. 
 

자연광으로 3일 정도 말린 달대는 장정이 6단을 지게로 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별도의 끈을 사용하지 않고 달대잎으로 묶는 ‘제매끼’를 합니다. 묶인 단은 낟가리를 지어 더 말립니다. 
갈대밭 속에 숨으면 찾을 수 없어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하기도 했던 갈대밭은, 인양리와 왕진리와 청소리 일부마을에서는 어려운 시절을 이길 수 있도록 부가 수입을 올려주었습니다.

달대를 후리는 일은 낫질과 지게질로 다른 일보다 힘든 일이었지만, 주민들은 달대일꾼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품삯 외로 달대 한 짐을 더 주는 특별대우가 있었고, 아침·점심·저녁밥 외에 오전과 오후에는 국수에 막걸리를 곁들인 넉넉한 새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대는 농사재료와 연료로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산이 적은 인양리 마을에서는 달대의 대부분이 땔감으로 쓰였습니다. 움막을 짓거나, 인삼밭의 발이나 물고기잡이 발, 이엉처럼 엮어 지붕 재료로 사용도 하였습니다. 
 
갈대 후리는 문화는 전국적으로 있었지만, 노래하며 갈대를 후리는 곳은 인양리(왕진리는 후렴만 불렀습니다)뿐입니다. 노랫말은 일꾼을 격려하고 다루며(지휘), 호흡을 맞추고 흥을 불러내 즐기는 내용입니다.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노래를 했다는 것은 인양리 옛 어르신들의 자연에 대한, 살아감에 대한 감사였겠지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벌이를 할 수 있게 한 인양리 마을 큰 부자들의 넉넉한 인심과 마음이 곁들였습니다. 그래서 인양리의 ‘갈대 후리는 소리’는 민속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겠지요. 

“갈에 갈대밭이 들어가면 근사햐!”
뻣뻣하고 부스스한, 선머슴 같은 갈대가 갈색 이삭을 폈습니다. 달빛을 받고 있을 모습을 상상합니다.     

(갈대 후리는 소리를 찾아낸 이걸재님과 갈대후리기보존회 지도강사 한승우님의 도움을 받아 글을 썼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