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5:03 (금)
배롱나무와 모덕사 – 면암 최익현
상태바
배롱나무와 모덕사 – 면암 최익현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9.13 15:05
  • 호수 14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 그러나 만일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고, 이 뜻을 이루지 못할진대 놈들에게 유린당하기 전에 신이 먼저 놈들과 싸워 패하여 죽는다면, 악귀가 되어 기어코 원수 놈들을 몰살시켜 이 땅에 용납 못 하게 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신을, 함부로 백성을 동원하는 반역이라 할지라도 신은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 면암 ‘창의토적소’ 부분 

다래 덩굴이 지붕을 이룬 그늘막에서 고택 ‘중화당’을 봅니다. 붉은 꽃을 피우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사랑채를 지키고 있습니다. 
중화당에서 오른쪽으로 ‘춘추각’과 ‘대의관’이 있습니다. 희고 붉은 배롱나무꽃이 환합니다. 중화당에서 왼쪽으로는 옥잠화가 가득한 사당 ‘모덕사’와 ‘영당’이 있습니다. 영당 입구에도 배롱나무의 흰꽃이 활짝 폈습니다. 영당과 고택과 춘추각과 대의관의 모습이 ‘모덕사(慕德祠)’ 마당 연못에 살짝 보입니다.
 

모덕사

1904년, 72세의 면암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하여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금지와 친일 매국노 처단 등을 요구하다 왜적에게 체포, 일본 사령부와 헌병대에 감금됩니다. 1905년 겨울, 홍주의병의 총수로 추대되어 의병 활동을 지휘합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 회복에 동참하자는 내용의 ‘포고팔도사민’의 글을 써 항일투쟁을 호소합니다.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집단적이고 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합니다. 

고택(중화당)

1906년, 봄은 서서히 오고 있었지만, 녹을 줄 모르는 한겨울의 조선이 계속되자 면암은 상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집을 나섭니다. 3월, 청양 정산(현재는 목면)에서 “내 나이 80에 가깝지만, 죽고 사는 것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며 거병을 결정합니다. 낙안군수를 지냈으며 왜인들이 싫어 정치를 사퇴한 올곧은 선비 임병찬을 만나, 전북 태인에서 함께 뜻을 굳힌 다음 거사 준비를 합니다. ‘창의토적소’를 올려 왜적의 침략에 무력 항거하며,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흉포와 열여섯 가지 신의를 배반한 내용을 일일이 따지는 성토문 ‘기일본정부서’를 발표합니다. 

이항로선생이 내린 ‘낙경민직’과 ‘면암’
이항로선생이 내린 ‘낙경민직’과 ‘면암’

1906년 6월 4일(음력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진행한 회합은 민족혼을 일으켜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됩니다. 의병을 모집하여 정읍에서 흥덕으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 읍내로, 500명이 넘는 의병이 행군을 하였습니다. 남원에서는 왜군이 아닌 우리 측 진위대의 방비가 워낙 견고하여, 곡성에서 다시 순창으로 800여 명의 의병이 돌이켜 돌아옵니다. 
11일,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황제의 의병해산통지도 받습니다. 순창에서 관군과 대치하자, 동포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의병을 해체합니다.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하였으나, 몇 명의 의병은 끝까지 면암곁에 남았습니다. 14일, 면암과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고, 일제에 의한 재판으로 ‘대마도 감금 3년’이란 판결을 받습니다. 

7월, 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속에 흙 한 줌을 넣고, 물 한 동이를 가지고 대마도행 배에 오릅니다. 임병찬과 함께 대마도 엄원 위수령 경비대에 수감되며, 유배지에서는 적이 주는 음식물이라 하여 왜놈의 음식을 거절하고 단식 투쟁을 합니다.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 74세의 면암은 한 많은 적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속에 품은 채 숨을 거둡니다. 

순창에서 서울로 압송 중 헌병이 촬영
순창에서 서울로 압송 중 헌병이 촬영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경주최씨 익현(崔益鉉, 1833~1907)은 아명이 ‘기남’이었습니다. 호랑이 머리에 제비턱으로 한없이 귀하게 될 생김이었으며, 타고난 재질이 뛰어났습니다. 14세가 되던 봄, 벽계(경기도 양평)의 이항로를 찾아가 성리학을 배웁니다. 스승 이항로는 매사에 옳고 바르게 일생을 살라는 뜻의 ‘면암(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었습니다.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며 스승으로부터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면암은 위정척사(바른 것,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사악한 것(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는 것)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시킵니다. 
 
23세에 명경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공맹의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로 삼고, 부정부패를 찾아내고 구국항일투쟁을 전개합니다.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으로 흥선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했으며, 그로 인해 관직을 삭탈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합니다. 불등평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반대하며 도끼상소를 올려 흑산도의 가시덤불 가득한 집에 위리안치(1876~1879)도 됐습니다. 
 

고종황제의 밀지.
고종황제의 밀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면암은 침묵했습니다. 고종은 면암에게 궁내부특진관, 중추원의관, 의정부찬정 등을 임명했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교육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1894년 7월 갑오개혁 당시도 고종은 면암을 공조판서로 임명했으나 “김홍집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명을 조작한 것”이라며 거부했습니다. 1895년 가을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고종은 민심을 안정시키는 선유 대원에 면암을 임명했으나, “원수를 갚겠다는 의병을 내가 어찌 선유하겠는가”며 거절합니다. 1905년 2월에도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지만, 역시 “나라 파는 무리를 처벌이나 하라”며 거부하였지요.  

1900년, 67세의 나이에 경기 포천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정산으로, 길고 먼 여행을 왔습니다. 6년간 면암이 살던 집, 충효를 전하는 집 중화당 사랑채에서 애국지사를 모아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습니다. 
춘추각에는 ‘면암집’을 비롯하여 면암이 읽은 책과 서간문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의관에는 송나라의 현인6군자 못지않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스승 이항로가 내린 글자 ‘낙경민직’ 이 있습니다. 사당 모덕사에는 면암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16일에 유림 주관으로 가을 추모제를 진행합니다.  

면암의 높은 덕을 사모하는 ‘모덕사’, 밤낮없이 드나들던 옛사람들을 추억이라도 하듯 이리 휘고 저리 휜 배롱나무가 사랑채를 지키듯, 밝히듯 합니다. 청렴을 상징하는 배롱나무다 보니 면암과 모덕사와 딱 어울립니다. 부드럽지 않은 눈초리, 웃음기 없는 입, 흐트러짐 없는 자세, 영당에 걸린 74세의 최익현이 안개비가 내리는 우목저수지를 내다봅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