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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매가 부르는 작은 노래 – 아주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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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매가 부르는 작은 노래 – 아주까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9.06 14:54
  • 호수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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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아주까리 동백꽃이 제아무리 고와도/동네방네 생각 나는 내 사랑만 하오리까/아리아리 동동 쓰리쓰리 동동/~’-강사랑 노랫말 「아리랑 목동」 부분. 

청양읍 골목, 도랑 옆에 큰 키의 아주까리가 붉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어릴 적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줄기도 열매도 붉은 ‘카르멘시타’라는 품종입니다.  

물기가 많은 땅을 좋아해선지 거름더미에 수북하게 잘 자라던 아주까리, 시골집 화단 구석에 한두 포기는 있었던 다용도식물입니다. 식물명은 ‘피마자’로 북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인도, 소아시아 등이 원산지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인도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는 피마자를 한자로 아주까리비(萞)를 써서 ‘萞麻子’라 합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피마자다 보니, 우리 옛 어르신들이 아주까리로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1937년 조선박물연구회에서 발행한 「조선식물향명집」(우리 꽃과 식물의 표준이름을 정하고, 우리나라 식물에 대해 정리한 최초의 식물도감)에는 아주까리의 꽃 이름이 ‘피마자’로 기록돼 있답니다.

아주까리는 기원전 4천 년 경 고대이집트유적에서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래된 재배식물이었습니다. 열매에서 뽑은 기름으로 불을 켰으며, 식품과 의약품으로 전 세계에서 사용되었지요. 원산지와 열대지방에서는 나무처럼 단단하게 10~13미터의 키로 자라는 다년생식물이지만, 우리나라 등 온대지방에서는 일년생식물로 2~3미터 남짓 자랍니다. 재배 품종이 많으며, 잎과 색도 여러 종류입니다. 

암수 한 그루인 아주까리의 줄기는 미끌미끌하며 속은 비어있습니다. 긴 잎자루가 있는 손바닥 모양의 큰 잎은 마디마다 어긋나며 5~11쪽으로 갈라집니다. 잎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은 원줄기 끝에서 차례로 달려 핍니다. 위쪽의 붉은꽃은 암꽃이며, 아래쪽의 연노랑꽃은 수꽃입니다. 씨방이 발달 된 암꽃은 보드라운 가시가 있는 꼬투리를 맺고, 꼬투리마다 3실을 갖춰 3개의 씨를 영글게 합니다. 

꼬투리가 진드기와 닮았다 하여 경상남도에서는 아주까리를 ‘똥꼬 없는 가분다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가분다리는 진드기의 경남지방 방언입니다. 짙은 갈색으로 부드러운 무늬가 있는 아주까리의 씨앗은 독성이 강해, 성숙하기 전에 따 버리기도 합니다. 북미 등의 나라에서는 재배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지만, 열을 가열하면 독성은 파괴됩니다.

씨앗으로 짠 기름 ‘피마유’, ‘피마자유’는 여러 곳에서 사용됩니다. 전등불이 귀하던 시절엔 호롱불을 밝혔습니다. 백금리 외갓집에 가면 어린 외삼촌이 겁을 잔뜩 주었습니다. ‘아주까리기름으로 등불을 켜 놔서 귀신이 보일 것이여’라고요. 들기름과 참기름 대용으로 먹기도 하였습니다. 여인들에게는 머리에 바르는 화장용 기름이 되었습니다. 사실, 모발을 보호하는 아주 좋은 머릿기름이었답니다. 남자들 역시 ‘포마드’로 머리 모양을 냈습니다. 
볶은 기름은 식중독이나 급성위장염, 이질을 처방하는 민간요법으로 사용하였으며 무좀에 바르는 약이기도 했습니다. 한방에서는 피마자기름을 변비 치료용 설사약으로 사용하였지요. 인도와 브라질에서는 피마유를 뽑기 위해 피마자를 대량 재배한답니다.

옛날에 배가 아프다면 어머니는 피마자기름을 한 숟갈 삼키게 했습니다. 콧구멍을 두 손으로 막은 채 구역질을 몇 번씩 하고서야 간신히 넘어갔지요. 이 지독한 향을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국가·전체주의적인 정치단체)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강제로 피마자기름을 먹이는 테러도 했습니다. 피마자기름은 독성은 없지만, 맛과 향이 역겹고 심한 설사와 복통을 일으켜 정신적인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피마자유의 성분 중에는 향기로운 ‘에난톨’이 있어 고급 머릿기름이나 최고급 향수의 재료로도 사용됩니다. 

피마엽, 아주까리잎은 묵나물로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줄기 위쪽의 부드러운 잎을 따서 삶습니다. 삶은 잎을 물에 한동안 우려 독성을 뺀 후, 말려 보관하였다가 정월 대보름 쌈나물로 먹습니다. 쌈으로 액을 다 가져간다는 의미가 있는 나물이었습니다. 여름날 소나기가 오면 이 큰 잎을 따서 우산처럼 머리에 쓰고 다녔습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일 때도 아주까리잎을 사용했지요. 넓적한 잎 한쪽을 잘라 손가락을 꽁꽁 싸맸습니다. 알싸한 잎 냄새가 잠들 때까지 코밑을 감돌았습니다. 
뽕나무잎으로 누에를 키워 고치를 생산하듯, 인도에서는 누에에게 아주까리잎을 먹여 ‘피마잠’을 합니다. 아주까리누에는 큰 고치를 지으며, 비단보다 질긴 천연섬유를 만든답니다. 

‘아주까리등불’, ‘아주까리선창’, ‘아주까리타령’, ‘강원도아리랑’, ‘영천아리랑’ 등은 노래제목으로, 노랫말의 소재로도 아주까리는 많이 썼습니다. 그만큼 옛 어르신들은 아주까리를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붉고 연노랑의 꽃을 한동안 들여다봅니다. ‘아리랑목동’의 노랫말처럼 아주까리꽃의 고운 모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아주까리는 노랫말뿐만 아니라, 속담도 있습니다. 자신도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남의 흉을 본다는 뜻의 ‘진드기가 아주까리 흉보듯 한다’. 아주까리도 기름이며 제 노릇을 한다는 ‘참깨, 들깨 다 노는데 아주까리는 못 노나?’라는 속담입니다. 어디, 아주까리뿐인가요? 봄이면 아무렇게나 나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하며 씨앗을 퍼뜨리고 가는 식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초록 한 포기도 제 노릇을 톡톡히 하는, 생각보다 귀한 존재들임을 배웁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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