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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역 찰방의 유유자적 청복 –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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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역 찰방의 유유자적 청복 – 다산 정약용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7.26 10:34
  • 호수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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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화성면 용당리 용곡마을 입구에는 금정도찰방 비석4기가 있습니다. 금정역지였다는 안내판 옆으로 ‘다산정약용선생사적비, 찰방윤공지경청간선정비, 찰방최공문오선정비, 찰방이후제관선정비’이며 효행마을비도 있습니다. 

용곡마을 입구 찰방비.
용곡마을 입구 찰방비.

옛사람들이 이용한 역참제(육로교통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지역으로 연결된 역도인 금정도의 중심역이었던 금정역은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습니다. 1614년에 시흥도가 금정도에 병합되면서 금정역은 홍주목의 용곡역(화성면 현 위치)으로 자리를 옮기고, 금정역을 포함한 17개의 역을 관할하였습니다. 청양현의 금정역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습니다. ‘1356년(공민왕5)에 양광도가 충청도로 개명되고, 청양현에 금정역과 정산현에 유양역이 설치되면서 서해교통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2005년 발행 청양군지. 

예전의 역은 공무 중인 관리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중요한 공문서 및 군사정보를 전달했던 곳이었습니다. 역을 관장하던 벼슬은, 고려와 조선초기에는 종구품의 ‘역승’이었으나, 조선 중종30년(1535)에 종육품의 ‘찰방’으로 승격되었지요. 찰방은 역과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의 최고책임자입니다. 행정면에서는 명망 있는 문신으로 지방에 파견하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관찰하게 함으로써 민생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초상화.

1795년 7월 26일, 정3품 병조참의 정약용은 종7품인 금정역 찰방으로 좌천되는 새 관직을 제수받았습니다. 청나라 신부 주문모사건에 둘째 형인 정약전이 연루되었기 때문으로, 사실상 유배였던 것이지요. 정약용찰방은 12월까지 일하며 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학문을 논하고,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정리하였습니다. 비록 6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금정찰방 임무를 수행하며, 본인의 일상과 사상 및 시골 사회의 동향 등을 기록하여 「금정일록」을 남겼습니다. 

금정역 찰방의 시(한국고전번역원 송기채번역) 
정약용은 열 살 이전에 이미 한시를 지어 시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은 후 오른쪽 눈썹에 세 갈래로 흉터가 남아 삼미(三眉)라고 불린 이유로, 큰형 약현이 시집 제목을 「삼미집」으로 지었습니다. 다산시문집 제2권에는 금정찰방 당시에 지은 시가 30여 편 있습니다.   

사의제
사의제

‘청양이라 관가 버들 길가 먼지 스치는데/기러기 떼 줄을 지어 해변에 날아드네/새하얀 시냇구름 새벽 햇살 받았는데/누르스름 나뭇잎은 새봄과도 흡사하네/산 구경할 계획은 차츰 허사가 되고/도성 떠난 사람으로 오락가락 맴도누나/아내는 깨를 털고 낭군은 벼 거두니/세상의 호걸이란 다름 아닌 농민일세’- 9월 13일, 공무차 충청도 순영으로 가는 길에 청양현에 들렀습니다. 부질없이 황망한 처지를 시에 담았습니다. 

‘겹겹산이 둘러싸 시름 얼굴 죄어드니/답답하기 언제나 옹기 속에 앉았는 듯/어찌하면 번쾌처럼 사나운 자 얻어서/군화발로 구봉산을 걷어차 엎어볼꼬’ 번쾌는 한나라 패현사람으로 유방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홍문 모임에서 항우가 유방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몄을 때 항우를 꾸짖고 유방을 탈출시켰습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역루 남쪽을 막고 있는 구봉산이 좌천돼 내려온 자신을 옥죄어 오듯 답답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후에 마음이 조용하고 맑아지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침저녁으로 산 기운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따금 위의 시를 읊을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어 구봉산에게 사과하는 시도 지었습니다. 
‘아침마다 맑은 기운 얼굴 펴기 충분하니/번화한 도회지에 있는 것보다 낫고 말고/어찌하면 원량 같은 담백한 자 얻어서/태연히 구봉산을 마주 대해 앉아볼꼬/가슴 펴면 얼굴 펴지 못할 곳이 없거늘/넓은 바다 높은 하늘 이곳에도 있고말고/~’ 원량은 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살며 시와 술로 낙을 삼았던 진나라사람입니다.

삼가 내직으로 전보하라는 명이 내린 12월 23일, 해 질 무렵 금정역을 떠나면서 한때 자리 잡고 살았던 곳을 막상 떠나게 되니 못내 아쉽다는 글을 남깁니다. 
‘석양에 말을 타고 관가 문을 나서니/관가 버들 하늘하늘 내 고향 흡사하다/시냇물 줄기 따라 십 리를 지나오니/산골 구름 걷힌 곳에 외론 마을 보이네/~’ 

청복과 열복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정약용은 39살에 강진으로 귀양을 갑니다. 처음 묵은 곳은, 동문 밖의 주막에 딸린 작은방이었습니다. 정약용을 학식 있는 사람으로 알아본 주모는 방 한 칸을 내주며 살게 하였지요. 정약용은 이곳을 ‘담백한 생각과 단정한 용모, 과묵한 언어, 신중한 행동’을 하겠다는 의지로 집 이름을 ‘사의재(四宜齋)’라 지었습니다. 사의재와 ‘보은산방’과 목리, ‘다산초당’에서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개혁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과 ‘민본정치’를 꿈꿨습니다. 아욱국을 즐겨 먹었으며,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책도 썼습니다.
 
사약이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유배지에서도 차를 즐긴 정약용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향기로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만덕산의 맑은 기운을 담을 물웅덩이를 만들고, 솔가리와 솔방울로 찻물을 끓였습니다. 백련사의 해장·초의선사와 차를 마시며 유교와 불교의 경계를 넘어 학문을 토론하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차를 워낙 좋아했던 정약용은, 만덕산의 별칭을 따 본인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었습니다. 

다산초당 마당의 차부뚜막
다산초당 마당의 차부뚜막

다산은 사람이 누리는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습니다. 열복은 벼슬길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가난해도 소박하고 운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열복만큼 청복도 큰 복이라며 청복을 치켜세웠는데, 가진 것이야 넉넉하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아니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세상에 열복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청복을 누리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하늘이 참으로 청복을 아끼는 것을 알겠다.’고 여러 글에서 말했습니다.
깊은 산 속에 살며,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노송에 기대 휘파람을 불어야만 다산이 누리고자 했던 청복은 아니겠지요. 밤낮으로 덥다는 일기예보로 더 먼저 더위가 오는 요즘, 시원한 수박 한 통 나누어 먹는 것 또한 ‘청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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