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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에서 다홍으로 – 숲속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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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에서 다홍으로 – 숲속의 여름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7.12 10:57
  • 호수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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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장맛비가 잠깐 멈춘 틈을 타서 나리꽃을 찾아 나섭니다. 며칠 전에 칠갑산 중턱에 털중나리가 피어있었습니다. 숲으로 들어서자 짙은 향기가 납니다. 쥐똥나무꽃 향기도 아니고, 아카시아 향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무슨 나무꽃향이 이렇게나 좋은가 흠흠, 숲길 가득 향기가 찼습니다. 어디서부터 나오는 향인지 장마철의 착 가라앉은 날씨만큼 나무와 꽃의 향기도 가라앉아, 진하게 오래오래 향을 맡을 수 있게 합니다. 

물레나물
물레나물

노란색 꽃들이 초여름을 장식했던 칠갑산은 붉은 꽃들로 환합니다. 여름 숲의 주인, 나리꽃이 활짝 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에서 잘 자라는 주황색의 꽃송이는 짙은 초록 숲에서 금방 눈에 뜨입니다. 알나리, 백합(흰 백자가 아니라 일백 백자로, 땅속의 비늘줄기가 많아서 붙여짐)이라 불리기도 하는 ‘나리’는 잎이 달리는 모양과 꽃이 피는 모습으로 종류가 나누어집니다. 
 
나리는 줄기 밑부분에 9~12장의 잎이 둥글게 돌려나는 말나리와 처음부터 끝까지 잎이 어긋나는 나리로 구분됩니다.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섬말나리는 2단에 걸쳐 잎이 둥글게 돌려납니다. 대표 격인 참나리는 나리꽃 중 가장 아름다워 진짜(참)라는 접두어가 붙었으며, 씨앗 대신 잎겨드랑이에 달린 검은구슬 모양의 살눈이 땅에 떨어져 싹이 틉니다.

갓난아이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꽃송이부터 어른의 큰 주먹만한 나리꽃은 하늘을 향하거나, 앞을 보거나 땅을 보며 핍니다. 꽃이 땅을 향해 피면 땅나리, 앞을 보면 중나리, 하늘을 보면 하늘나리입니다. 환경부에서 희귀종으로 보호받고 있는 나리도 있습니다. 잎이 솔잎처럼 가늘고 분홍색 꽃이 피는 솔나리로 해발 일천 미터 이상의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정말 예쁩니다. 누군가는 별당아씨를 닮은 꽃이라고 하였습니다. 

끝이 동그랗게 말린 붉고 강렬한 꽃잎에는 짙은 자주색 점이 총총 박혀있습니다.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고 있는 꽃잎은 6장이지만, 안쪽과 바깥쪽 꽃잎의 넓이가 다릅니다. 밖의 3장은 꽃받침이지만 색이 발달하여 꽃잎처럼 보이는 것이며, 안의 실제 꽃잎보다 폭이 약간 좁습니다. 한여름 태양의 붉은 기운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 꽃잎에, 꽃의 요정이 질투라도 하듯 뿌려놓은 짙은 점으로 호랑이꽃이라 불렀던 옛 생각이 납니다. 

하늘말나리
하늘말나리

참나무 밑에 세 개의 꽃봉오리를 내민 하늘말나리가 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참나리에 비해, 하늘말나리는 반그늘을 좋아하여 큰 나무의 옆이나 밑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꽃봉오리는 원줄기 끝이나 곁가지 끝에 보통 1~3개를 맺습니다. 긴 줄기는 밑 부분의 돌려나기 잎으로부터 한참을 더 자랍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어긋나기 잎은 작아집니다. 푸른 열매를 맺고 있는 생강나무 밑에도 두 송이의 꽃이 하늘을 향해 피고 있습니다. 
꽃잎에 반점이 없으며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지리산하늘말나리와, 짙은 노란색의 꽃을 피우는 누른하늘말나리가 있습니다. 

털중나리
털중나리

향기가 별로 없고 여름을 알리는 야생의 나리꽃은 온몸에 털이 난 털중나리를 시작으로 꽃이 핍니다. 말나리와 중나리가 피고 지면, 참나리가 여름의 끝자락까지 남아 핍니다. 
옛 어르신들이 좋아했던 우리꽃 나리는, 한글이 생기기 전에는 ‘견내리화’라 불렀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책가도(책장과 책을 중심으로 문방구와 골동품, 꽃 등을 그린 정물화)에도 나리꽃은 자주 등장하였답니다.     
 

박쥐나무

장맛비가 내립니다. 끊임없는 빗소리는 세상을 씻겨줄 듯합니다. 
소태나무 밑에서 홀로 나와 꽃대를 내밀던 하늘말나리는 장마가 지나가면 더 고운 꽃을 피우겠지요. 참나무들 또한 더 많은 도토리를 매달고자 짙은 초록색 잎을 자주자주 펄럭일 것입니다. 

박쥐나무 꽃
박쥐나무 꽃

숲에는 장마철에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었습니다. 식물이 싹을 틔울 때 나오는 기름이 바위나 돌에 남아있다 비를 만나면 비냄새를 만들고, 흙에서는 유기물을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비를 맞아 냄새를 냈습니다. 식물에 난 털도 비를 맞아 찢어지면서 향을 내뿜기도 하였습니다. 흙박테리아와 식물과 비가 어울려서 내는 향, 숲에 들어서면서 받았던 장마철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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