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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처럼 고운 나무 - 노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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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처럼 고운 나무 - 노각나무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6.28 15:59
  • 호수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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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동백꽃을 닮았습니다. 차나무꽃이 크게 핀 듯도 합니다. 드문드문 핀 꽃 밑에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살며시 향이 내려옵니다. 큰 꽃에 비해 은은하고 미미한 향은 그냥 지나치면 놓치고 맙니다. 나무 자체도 늘씬하지만 미끈한 줄기에 껍질이 벗겨지면서 만드는 모양도 아름답습니다. 

노각나무는 우리나라 순수 토종나무로 나무껍질의 색과 모양이 특이하여 쉽게 눈에 뜨이지만,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는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내음성(음지에서도 광합성을 하여 독립 영양분을 마련할 수 있는 식물의 성질)이 강해 나무 밑이나 그늘, 해변가에서 잘 자랍니다. 특히 지리산이나 소백산 등 남쪽의 깊은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좋아합니다. 한 미국인에 의해 전 세계에 여러 종류로 품질개량 됐지만,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의 껍질과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분홍빛이 살짝 도는 쭉쭉 뻗은 줄기에 회색과 황갈색 반점의 알록달록한 무늬를 지닌 노각나무는, 나무 제일의 ‘피부미목’이란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나무껍질이 비단같이 아름답고 무늬가 고와서 금수목, 비단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름에 피지만 동백꽃을 닮아서 하동백, 나무껍질이 사슴의 무늬 모양을 닮아 녹각나무라 부르던 것이 노가지나무, 노각나무로 변했다고도 합니다. 

꽃은 무더위가 시작되는 계절, 나무들의 꽃들이 귀해질 때 핍니다. 빽빽한 초록 잎사귀에 비해 꽃의 수가 많지 않습니다. 새로 자란 가지 끝에서만 피기 때문이지요. 흰 꽃은 2~3일 피었다가 툭툭 송이째 떨어집니다. 대신 한꺼번에 피지 않고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가며, 20여 일 이쪽저쪽에서 차례차례 꽃을 피웁니다. 꽃봉오리도, 꽃 핀 모습도, 꽃 지는 모습도 영락없는 동백꽃입니다. 

가지 겨드랑이에서 아우성치듯 꽃봉오리가 올라옵니다. 몇 밤을 봉오리로 지내다, 꽃받침이 벌어지며 흰 꽃잎을 서서히 보여줍니다. 꽃송이는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며 벌어집니다. 암술머리가 다섯 조각으로 갈라진 굵은 암술대를 가운데 두고, 도톰한 꽃밥의 수술이 들쑥날쑥 많습니다. 가장자리가 레이스를 단 것처럼 주름진 흰 꽃잎 위로 노란 꽃밥 가루가 떨어집니다. 환하고 큰 꽃잎과 탐스러운 수술의 꽃밥이 꿀벌을 불러들였습니다. 

노각나무는 전통목기를 만드는 나무로, 예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남원 일대의 유명한 목기는 지리산 노각나무로, 제조기술이 발달한 실상사 스님들로부터 전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나무의 재질이 단단하며 습기를 빨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목기 재료로 안성맞춤이랍니다. 나무의 껍질이 두껍지 않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어 고급장식장, 가구나 건축물의 목재로도 활용합니다. 

노각나무는 명약 성분을 가진 꽃나무이기도 합니다. 한방에서는 간과 폐·신장 질환을 다스리는 대표적 약용식물로 만병통치 수준의 화목류에 분류됩니다. 신경통, 이뇨 작용 등 몸속의 염증 제거에도 탁월하여 산삼나무라고도 부른답니다. 옛 어르신들은 산에서 넘어져 다쳤을 때, 이 나무의 껍질을 찧어 붙이고 가지나 껍질을 달인 물을 마셨답니다. 통증이 없어지고 뼈를 단단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있어 봄에 잎이 나기 전에 고로쇠나무처럼 수액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답니다. 

노각나무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공해에도 강해 다른 나라에서는 가로수로 많이 이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라는 속도가 느리고 종자 번식이 어려워 활용이 잘되지 않습니다. 어린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립니다. 푸르고 울창한 숲속에서 노각나무는 하얀 꽃으로 빛을 발하지만, 사실 나뭇잎 한 장 없는 추운 겨울에 미끈한 줄기로 더 눈부십니다.
 
대부분의 나무가 그렇지만, 특히 노각나무는 나이 들며 더 아름다워집니다. 오래될수록 줄기의 나무껍질은 큰 조각으로 벗겨져 얼룩무늬를 근사하게 만들지요. 해를 넘길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노각나무를 보면서, 새 가지에게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온 힘을 실어주는 묵은 가지를 보면서, 어떻게 나이 들어야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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