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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다 죽은 늙은이 – 매월당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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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다 죽은 늙은이 – 매월당 김시습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5.03 14:23
  • 호수 13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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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큰 가지 작은 가지 눈 속에 덮였는데/따뜻한 기운 응당 알아차려 차례로 피어나고/옥골의 혼이 비록 말 없어도/남쪽 가지가 봄 뜻 알고 먼저 꽃망울을 피우네’-김시습 「탐매」  

분홍빛깔의 꽃송이, 홍매화입니다. 매화나무 밑에 앉아 바람에 날리는 꽃송이를 봅니다. 꽃송이 하나를 주워 꽃받침을 돌립니다. 나빌레라 꽃잎은 넓고 둥글게 날아 떨어집니다. 은은하게 향도 날립니다. 바닥이 분홍꽃잎으로 덮입니다. ‘매화꽃잎이 바람에 떨어져 말발굽에 짓밟혀서 더럽혀지는 것’을 보며 자신을 타일렀던 옛시인, 매화를 사랑했던 매월당 김시습을 생각합니다. 

길 가운데 무량마을이라 쓴 표지석이 있고, 길 한쪽으로는 나무장승 여럿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얼굴 모양과 표정이 다 다릅니다. 왼쪽 두 분은 얼마나 오래됐는지, 형체도 없이 부서진 몸체만 남았습니다. 연등이 무량사를 안내합니다. 
원목을 그대로 세운 듬직한 일주문입니다. ‘만수산무량사’ 편액을 올려봅니다. 한반도지형의 머릿도장이 오른쪽 상단에 있습니다. 천왕문 돌계단에서 보는 절 마당은 한 장의 사진액자입니다. 

천왕문에서부터 돌길을 따라 석등과 5층석탑과 극락전이 금을 긋듯이 일직선으로 있습니다. 석등과 석탑을 중심으로 붉고 노란 연등이 석가탄신일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무량사’는 신라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대규모 불사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고, 조선시대 때 진묵대사가 크게 고쳐 지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목조건물의 극락전은 빛바랜 단청으로 더 예스럽습니다. 너그럽고 넉넉해 보입니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눈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극락전 옆으로 ‘우화궁’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천년에 한 번 핀다는 만다라꽃이 하늘에서 비 오듯 내렸다는 데서 따온 이름입니다. 꽃비 궁, 설법하는 곳입니다. 현판에도 붉은꽃이 내려 앉았습니다. 

우화궁과 원통전 사이, 무량사의 주인공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이 있습니다. 수묵담채화의 영정 앞에 촛불이 켜있습니다. 패랭이 염주끈을 귀 뒤로 넘기고 입을 앙다문 초상화입니다. 술병을 차고 시를 짓듯이, 술병 차고 초상화를 그린 듯 얼굴빛도 불콰합니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도 듣기 싫다는 불편한 표정입니다. 선승도 대학자도 아닌, 세상에 불만을 잔뜩 품은 모습이지만, 초상의 주인은 ‘설잠’이고 ‘매월당’이고 ‘청한자’입니다. 

‘수심 가득한 창자를 어디에 묻으랴’며 탄식했던 김시습은 30여 년 방랑 생활을 무량사에서 끝냈습니다. 육신의 고통과 번뇌를 덜어내며 자화상을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네 모습은 이다지도 못 생기고 마음까지 어리석으니, 골짜기에 버려져야 마땅하다.’

세 살에 글을 깨치고 다섯 살 때 시를 지어 오세(五歲) 신동으로 불렸던 김시습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 때 세상을 등졌습니다. 승려가 되었다 다시 속인이 되기도 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습니다. 자연과 한,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시 2200편이 전해집니다. 

김시습은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지팡이를 짚고 눈길에 매화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엄동설한과 찬바람에 흔들리며 꽃을 피우는 야생매화를 특히 좋아했지요. 무심한 매화에 이끌려 자신도 무심한 경지에 들곤 했답니다.

비뚤어진 세상을 버렸으나 결코 버리지 못하여, 자유롭지도 못했던 고독한 영혼 매월당이었습니다. ‘행여나 조금이라도 내 마음 아는 이 있어, 천년 뒤라도 품은 회포 알아주었으면/~/가만히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워지는 것은, 일찍이 깨닫지 못한 탓이네’-「나의 삶」 부분  

영정각 옆 도랑 건너에는 당우 두 채가 나무 사이로 보입니다. 연두 햇살이 조촐한 모습을 더 고적하게 합니다. 산신각과 청한당입니다. 청한당은 선방 겸 손님방으로 돌 축대 위에 아담하게 지어졌습니다. 한동안 다녀간 사람이 없는 듯한 툇마루에 앉아 현판을 올려봅니다. 한없이 편안해지는 절 무량사에서 매월당은 지극한 무량을 얻었을까? 봄물이 흠뻑 오른 만수산은 연두와 초록 물감을 듬성듬성 뿌린 듯 윤기가 흐르며 부드럽고 아늑합니다. 청한당 마당 끝이나, 영정각 처마 옆에 매화나무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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