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7 17:12 (수)
부월호서하고 일성충신이라 - 번암 채제공
상태바
부월호서하고 일성충신이라 - 번암 채제공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4.12 13:48
  • 호수 139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여우와 쥐 같은 놈에게는 도끼와 톱 같고 충신과 어진 이에게는 해와 별 같이 하였도다 –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지은 조문 부분) 

홍살문을 지나 사당 뒤쪽의 야트막한 언덕에 오릅니다. 푸르게 잘 자란 쑥과 보랏빛 제비꽃이 한창입니다. 낮은 담장 안에는 달랑 한 송이 꽃을 피운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화성면 구재리 동줏말, 250년 전에 이미 환경을 생각했던 재상의 영혼이 머무는 곳, 번암 채제공의 사당 ‘상의사’입니다.

6층 돌계단 위 외삼문 안에는 3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안마당 왼쪽 건물 ‘장판각’에는 제향에 사용되는 그릇이, 오른쪽 건물 ‘경모재’에는 제향 때 입는 의복이 보관돼 있습니다. 푸릇푸릇 잔디가 올라오는 정갈한 안마당을 지나 계단에 오르면 ‘영당’으로 향하는 중문입니다. 영당은 아직 잎눈이 트지 않은 배롱나무와 크고 작은 향나무가 양옆에 협시보살처럼 서 있습니다.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는 영당 안에는 세 점의 영정이 있습니다. “도화서 화원 이명기가 그린 64세 때 채제공 초상화와 그의 종조부, 고조부의 초상화죠. 원본은 수원화성박물관에 보관돼 있어요.” 번암의 6대 후손 채명석씨가 설명합니다. 
 

채제공은 1720년 4월 6일 충청도 홍주(청양군 화성면 구재리 어저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저울마을로 가는 길에는 관문 같은 작은 터널이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옆으로 나이 많은 느티나무 3그루가 있습니다. 부러지고 구멍 난 세 그루의 느티나무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습니다. 
마을 안쪽의 백 년이 넘었다는 기와집을 지나 좀 더 오르면 채제공 생가터가 있습니다. 삼백 년 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으나, 높은 집터는 마을이 훤히 내려 보입니다. 생가터 앞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당시 먹을 물이 없을 정도로 가물었는데, 채제공이 태어나 첫울음을 울자 우물에서 물이 펑펑 솟았다는 전설이 있다고 어저울마을의 염순례님이 전해줍니다.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했던 명재상 채제공은 영조의 사도세자 폐위도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며 포용적인 사상 정치를 펼쳤습니다. 신해통공(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특권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정책)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유형원의 실학을 이어받고 실학자들을 후원하였습니다. 임금 노동과 노동 실명제, 기구상과 수용보상 등 실학정신에 입각해 수원화성도 건설하였습니다. 
 
중국의 북경을 다녀오면서 쓴 기행 시집인 「함인록」을 비롯하여 많은 글도 썼습니다. 시를 짓고 토론·감상하는 모임을 하며 문학 활동을 하였지요. 산문 형식의 글을 많이 썼으며, 제주 김만덕의 이야기 등 전기적인 글도 썼습니다. 아름다운 곳을 다니며 쓴 유람기나 정원을 감상한 화원기가 많으며, 문학을 통해 후배들을 격려하고 남인 문학의 계승을 부탁하였습니다. 

채제공의 문학세계는 폭넓은 양식을 넘나들었지만, 특히 정치적 글쓰기와 상소문으로 당대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72세에는 「번암시문고」를 엮었습니다. 이에 정조는 평을 직접 짓고 써주었으며,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번암집」 편집과 간행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직접 범례를 만들어 문집을 편집하는 기준으로 삼게 하였지요. 조선시대에 임금이 신하의 문집에 범례를 제정해 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채제공에 대한 정조의 신뢰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번암집은 62권30책 중에 50권25책만 전해지며, 수원화성박물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왕권 강화로 국정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의리를 구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던 채제공은 문학과 환경과 경제, 그리고 행복한 공동체도 꿈꿨습니다. 어저울에서 동줏말의 강당을 가며오며,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연둣빛 잎에게 수없이 말 걸었을 12살의 채제공을 생각합니다. 

생가터 앞 우물
생가터 앞 우물

‘채제공은 군자의 표상과 같았다. 타인의 단점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 않았다. 예법을 세밀하게 알아 정확하게 사리를 밝히고 득실을 따졌으며, 늙어서도 어릴 때와 같이 행동거지가 무겁고 걸음걸이가 편안하여 법도에 맞았다. 집은 검소하여 거처하는 곳에는 헤지거나 기운 돛자리 하나와 요 하나를 펴 두었고, 베개 가에 오직 오래된 책상과 깨진 벼루 하나만 있을 따름이요, 서적이 좌우에 쌓였지만 책을 정돈하는 것에 힘쓰지 않았다고 한다.’-한글로 기록한 채제공의 일대기 「번상행록」 중에서 발췌.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