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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봄 햇살의 다사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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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봄 햇살의 다사로움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3.02 14:33
  • 호수 138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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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기고
유철남 / 경기도 고양시 거주
유철남 / 경기도 고양시 거주

그동안 별러오다가 휴일이 되어 아내와 같이 나들이도 할 겸, 모처럼 칠갑산에 있는 고향집을 찾아갔다. 새벽 일찍 출발을 하여서인지 도착하니 아직 점심때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파릇파릇한 신록과 뽀얗고 붉은 꽃들은 이미 성대한 향연을 벌이고 있다. 모내기를 앞둔 철이라서 논에는 출렁이는 물들이 이따금 떠 있는 하늘의 구름을 그림처럼 받아내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도시로 나오신 지가 20여년이 다 되어가니, 이 집에 사람이 안 산 지도 꽤 오래되었다.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멀리서 볼 때는 멀쩡해 보이던 집은 마음대로 돋아난 이끼와 잡초, 그리고 여기저기 뻗어나간 대나무들로 어지러운 모습이었다. 정갈하신 할머니는 집안에 잡초가 돋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다. 비가 오고 나서 어린 질경이나 쇠비름이 울안에 자리를 잡을라치면 호미도 안 쓰시고 맨손으로 뽑으셔야 마음이 개운하신 분이셨다. 목단과 달리아가 소담스레 꽃을 피우던 화단은 잡초 하나 없이 늘 깨끗하였고, 담 아래 장독대에 있는 독들은 언제나 매끄러운 윤기를 흘리고 있었다.

안채 가운데에 있는 안방은, 햇살이 문살을 가르며 문풍지를 곱게 물들이는 아침이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정겨운 아침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옆에 앉아 밥을 먹는 손자의 밥숟가락에 계란반찬을 올려주시며 대견하신 듯 웃으시곤 하셨다. 명절이면 할아버지를 찾아오시는 마을 어르신들이 점잖게 약주와 다과를 드시는 엄숙한 공간이기도 했다. 밤이면 부모와 떨어져 우는 손자를 ‘집 뒤 왕 소나무 부엉새가 잡아 간다’고 달래시며 품에 안아주시던 따스한 곳이었고, 시집 안 간 고모가 신식 재봉틀로 고운 옷을 짓던 곳이며, 모시처럼 머리가 하얗던 감나무 골 할머니가 가는 실들을 무릎에 비벼 이으시며 밤새 모시처럼 긴 이야기를 해주시던 곳이었다.
아내는 장독대와 부엌에서 가져온 항아리며 그릇들을 하나씩 햇볕에 비추어보고 두드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집안을 장식할 인테리어 소품으로 쓸 생각이리라. 장독대는 장이나 반찬들을 저장하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정성을 바쳐 소원을 비는 치성의 공간이기도 했다. 늦게 군대에 간 아버지를 위하여 할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맑은 물을 떠올리며 두 손을 마주잡고 옷깃을 여미며 머리를 조아리셨다. 임자 없이 썰렁한 외양간에는 뿔이 굽은 늙은 암소가 20여 년 동안을 한 식구처럼 살았었다. 두 고개 너머에 있는 산전 밭에서 쟁기를 끌다가도 고삐 줄을 등에 얹어주면 길을 잃지 않고 혼자 돌아와 집안 외양간에 얌전히 앉아있을 만치 영물이었다. 

청양은 테마 관광고장으로 훌륭하게 변모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못 보던 솟대들이 솟고 크고 웅장한 장승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동안 항상 변화에 뒤쳐져 있었는데 이렇게 인근 마을들에 앞서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은 필경 바람직한 일이었다. 마을을 나서면서 점점 작아지는 오래된 집을 바라보았다. 그 긴 시간을 돌보는 이도 없이 저렇게 외롭고 왜소한 모습으로 추억과 정만을 간직한 채 스스로를 지켜왔던 것이다. 

오늘도 돌아올 자식을 기다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산모퉁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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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아 2021-03-06 19:09:35
모처럼 두고 온 고향의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참으로 애잔하고 그립습니다. 좋은 글로 잠시나마 고향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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