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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운 은빛 갓털 - 박주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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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운 은빛 갓털 - 박주가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1.03.02 14:17
  • 호수 13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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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황금빛 노란 꽃잎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추위를 잘 이겨내고 기다려준 것이 반갑고,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쌓인 눈을 몸의 열기로 녹이고 핀 복수초입니다. 개불알풀도 꽃잎을 펼쳤습니다. 넉 장의 꽃잎 위로 올라온 두 개의 수술이 안테나 같습니다. 허리를 낮추어, 어린 연둣빛 잎 사이로 불어오는 파랑 바람을 봅니다. 

여기저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데, 아직도 씨를 품고 있는 박주가리가 있습니다. 
박주가리,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덩굴식물로 기댈 것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잘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밤나무밭이나, 길가의 밭두렁이나,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크게 무리를 이룹니다. 열매의 모습이 박으로 만든 바가지와 닮아서, 표주박 모양의 열매가 여물어 벌어지는 모습이 조그만 바가지 같아서, 박주가리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은빛 털이 있는 씨앗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받습니다. 

심장 모양의 넓은 잎을 매단 줄기는 특별한 덩굴 수단은 없지만, 무엇이든 감고 기대며 오르거나 옆으로 뻗어나갑니다. 한여름에 피는 꽃은 연한 보랏빛으로, 종처럼 생긴 꽃부리에서 다섯 갈래로 갈라집니다.

박주가리의 꽃은 두 종류입니다. 암꽃과 수꽃의 기능을 함께 하는 짝꽃 꽃송이와 수꽃 꽃송이가 있습니다. 한 송이의 꽃에 두 개의 기능이 있어서인지, 짝꽃은 수꽃보다 꽃송이가 큽니다. 길게 밖으로 나온 암술머리와는 다르게, 수술은 암술머리 아래에 있습니다. 

꿀을 빨기 위해 나비는 태엽처럼 말리는 긴 입으로 우아하게 움직이지만, 벌들은 머리를 꽃송이 속에 푹 박아야 합니다. 그렇게 꽃가루받이는 벌들로 인해 확실하게 이루어지지요. 수꽃 꽃송이에도 긴 암술머리는 있지만, 꽃가루받이를 할 수 있는 통로는 막혀있답니다. 꽃만 피우는 것이 살아남기 위한 박주가리 수꽃의 생존전략이지요. 

솜털 가득한 별 모양 연보랏빛 작은 꽃은 푸르고 길쭉한 열매를 만듭니다. 손톱만 한 꽃에 비해 열매는 어찌나 큰지, 정말 이 꽃의 열매가 맞는지 눈이 의심될 정도입니다. 오톨도톨한 옹두리가 있는 푸른 열매는 표주박보다는 오히려 여주 열매를 닮았습니다. 
박주가리의 세상도 여느 식물만큼이나 특별합니다.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바람을 이용하지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던 씨앗이 땅에 내려앉으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하나의 독립된 식물로 자랍니다. 

누렇게 열매가 익으면 겉껍질이 저절로 벌어집니다. 껍질 안쪽으로 흰 솜털을 단 씨앗들이 가지런하게 꽉 차 있습니다. 충분히 익은 씨앗들은 반짝이는 흰 갓털을 펼쳐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바람이 불면 씨앗들은 낙하산을 펼치듯 차례차례 빠져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눈이 부십니다. 새가 되고 싶은 꿈이 첩첩 포개진 것은 아니었을까, 은빛 갓털은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갓털은 높이 날며 소나무 숲과 흙밭으로 씨앗을 데려갑니다. 저런, 어린 갓털은 날개가 저린 듯 도랑물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한 올의 갓털도 밧줄에 걸려 버렸네요.

높이 날아오르는 씨앗의 아름다움도 순간입니다. 씨앗이 날아간 텅 빈 열매가 바람을 맞습니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한 열매는 이제야 마음이 가볍습니다. 갓털이나 씨앗보다 더 가벼워진 빈 열매가 돼서야, 완전한 홀가분에 완벽한 자유의 시간이 된 것이지요. 바람과 빗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고 불안했던 긴 시간이 눈부시고 찬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연둣빛 봄에 밀려 어디로든 가야 할 시간이 됐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매는 평온하고 자유롭습니다. 

문박산 입구의 고라니를 막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서, 고리섬들 길가의 무궁화나무에서, 말라버린 열매가 반짝이는 것을 봅니다. 늘 그 길을 걸었어도, 여름철 보여주지 않던 꽃을 겨울철이면 눈부신 갓털로 보여주는 박주가리입니다. 꽃이나 향기로도 잡지 못한 사람들의 시선을, 막 떠나갈 씨앗이 잡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갓털로 솜 대신 도장밥과 바늘쌈지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먼 먼 옛날, 우리의 어르신들은 박주가리 갓털로 겨울옷을 만들어 입었답니다. 바람에 한 알 두 알 빠져 날아가는 씨앗을 보며, 옷은 고사하고 도장밥 한 개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모아야 할지 궁금해집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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