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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곱지만 맛없는 열매 – 백당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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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곱지만 맛없는 열매 – 백당나무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12.14 18:23
  • 호수 13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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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초록도 울긋불긋함도 없지만, 단풍보다 곱고 영롱했던 붉은빛이 서늘한 산을 더 시리게 합니다. 다른 해 같으면 한 번쯤은 눈이 내리고도 남았을 그런 계절이지만, 눈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에 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증이 발동합니다. 

노르스름하게 물들던 커다란 잎 사이로 반짝이는 열매를 내놓던 백당나무도 겨울을 맞았습니다. 깔때기 모양으로 달린 채 밝고 맑고 영롱하게 빛나며 보석같이 탱탱했던 빨간색 열매도 쪼글쪼글해져 갑니다. 잎이 붉은지 열매가 붉은지로 내기하던 화살나무도 길쭉한 모양의 작은 열매만 남았습니다. 작살나무와 쥐똥나무도 보랏빛 열매와 까만 열매만 달랑달랑 남겼습니다. 이미 먼 곳으로 옮겨가 다시 움틀 터를 잡았어야 할 열매들입니다. 봄부터 푸른 잎들은 광합성을 하며 꽃을 피웠고, 새들의 눈에 확 띄도록 붉은색의 열매를 만들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려 늘어진 백당나무 붉은 열매를 봅니다. 산토끼꽃목, 인동과의 백당나무는 산지의 습한 곳에서 잘 자랍니다. 푸른 잎은 끝이 3개로 갈라지지만, 위쪽에 나오는 잎은 갈라지지 않고 길쭉합니다. 밑의 잎들에게 더 많은 햇볕을 받게 하는 배려겠지요.

5~6월에 피는 꽃의 가장자리에 있는 흰 잎은 꽃이 아니라 곤충을 유혹하기 위한 눈속임, 헛꽃입니다. 새하얀 가짜 꽃은 벌과 나비를 부르는 역할을 하며 수십 송이의 자잘한 황록색 참꽃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흰나비가 원을 그린 것처럼, 부채춤을 추는 것처럼 예쁩니다. 꽃이 피는 모양이 평평한 접시 모양이라서 접시꽃나무라 부르기도 합니다. 꽃만큼은 아니지만 은은한 향은 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밀원식물이기도 합니다. 꽃가루의 맛보다도 봄꽃이 지고 여름꽃이 피기 전, 백당나무의 꽃이 피기 때문이라는 계절상의 이유라지만, 어찌 됐든 일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꽃 중의 꽃입니다.

백당나무는 나무의 모양이나, 초여름에 피는 흰색의 꽃송이나, 가장자리부터 물드는 넓적한 잎이나, 가을부터 겨울까지 맺혀있는 빨간 열매들이 참으로 아름다운데도 가정집의 정원수나 공원의 관상용으로 자라지 못하는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부패하게 되면, 열매로부터 나오는 냄새는 그 주변을 온통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떨어진 은행알을 밟는 것처럼요. 

어디 그뿐인가요? 꽃만큼이나, 꽃보다도 돋보이는 열매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보낼 준비를 마쳤는데도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새들이 먹기 좋은 크기, 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곤충이나 새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그랗고 반질거리는 붉은 열매를 한 알 따 입에 넣습니다. 비릿하고 뒤숭숭한 맛은 금방 뱉게 합니다. 보석같이 영롱한 모양새에서 이런 맛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기치 못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고운 빛깔의 열매가 맛을 내지 않은 이유를 생각합니다. 

백당나무뿐만 아니라 꽃 없는 계절에 빛을 발하는 열매들, 백량금, 덜꿩나무, 화살나무, 매자나무, 호랑가시나무 등 단물이 짭짭 나올 듯한 열매들이지만 아무도 먹지 않습니다. 빛깔이 곱고 먹음직스러워도 맛이 없기 때문이지요. 영양분과 수분도 적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맛없는 열매를 만드는 식물들의 지혜랍니다. 예뻐서 보기도 좋고 영양가도 있고 맛도 좋다면, 새들은 열매가 완전히 익기도 전에 몰려들겠지요. 한꺼번에 먹어버리고 한 장소에 많은 양을 배설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열매속의 씨앗들이 멀리멀리, 고루고루 퍼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빨갛게 잘 익은 열매를 따 먹었다가 맛이 없어 금방 되돌아서는 새들이, 붉은색의 끌림에 다시 열매를 찾게 하는 나무의 생존전략, 백당나무의 존재 이유랍니다.   
   

꽃도 잎도 없는 가지에 방울방울 달린 백당나무는 오늘도 내일도 새들을 기다립니다. 열매가 더 마르기 전에, 색깔이 더 검어지기 전에 새의 눈에 뜨이길 바랄 뿐이지요. 불규칙하게 갈라진 줄기의 껍질을 보니, 나무의 안타까운 심정을 보는 듯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또 보내며, 나 역시 백당나무 열매를 비롯한 맛없고 반짝이는 열매처럼 겉모습만 번듯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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