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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덕 – 도꼬마리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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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덕 – 도꼬마리 열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12.07 19:06
  • 호수 13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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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단풍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들판도 휑합니다. 눈부셨던 넉배의 갈대군락도 갈색이 되었습니다. 어린 미루나무들이 연보라 저녁 하늘에 무늬를 넣은 벽천리 녹색길도 금방 어둠에 갇힙니다. 
누렇게 마른 들판에서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식물이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도 기다립니다. 묻지도 않고, 알게 모르게 서슴지 않고 어디든지 달라붙고 싶어서입니다. 한번 붙으면 도통 떨어지려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 도꼬마리의 열매입니다.

길가에서 도꼬마리 한 포기가 철 지난 열매를 익히고 있습니다. 거친 톱니가 가장자리에 있는 넓적한 푸른 잎 사이에, 가시 범벅인 단단한 열매에 붉은빛이 올랐습니다. 
도꼬마리는 꽃보다 열매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연한 녹색으로 피는 꽃은 한 포기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피지만, 사람이나 곤충의 시선을 끌지는 못합니다. 바람이 꽃가루받이를 도와주기 때문에 화려한 꽃잎으로 곤충을 유혹할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보랏빛 긴 잎자루 끝에 손바닥처럼 펼친 삼각형 커다란 잎이 있습니다. 잎자루와 잎겨드랑이, 곤봉 모양의 길쭉했던 암꽃 자리에 열매가 옹기종기 맺혔습니다.

열매속에는 크고 작은 2개의 씨앗이 있으며, 특이하게도 이들 씨앗의 발아 시기는 같지 않습니다. 대부분 큰 씨앗이 싹을 틔우지만, 무엇으로든 잘못될 경우에는 나머지 씨앗이 싹을 틔우는 배려와 기다림의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도꼬마리 씨는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 붙어 옮겨집니다.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기 위함입니다. 다른 식물들의 씨가 몸을 가볍게 하여 바람에 날아가거나, 열매를 새에게 먹혀 종족을 번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도꼬마리 열매의 겉껍질에는 갈고리 모양의 가시 같은 돌기와 짧은 털이 가득 붙어 있습니다. 가시 있는 열매는 옷에 스치기만 해도 찰싹 달라붙습니다. 부드러운 천이나 털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떼어야만 떨어집니다. 열매는 여러 동물의 몸에 붙어 여기저기로 옮겨집니다. 동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씨앗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면, 도꼬마리는 그곳에서 움을 틔우고 자라겠지요. 약삭빠르고 교활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 종을 퍼뜨리고 보존하기 위한, 그들만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예전에는 산길이나 들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바지 밑부분에 더덕더덕 도꼬마리 열매가 붙어 있곤 하였습니다. 짓궂던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의 머리에 도꼬마리 열매를 던지며 장난질을 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습니다. 언니들은 털 스웨터에 도꼬마리 열매를 꽃처럼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도꼬마리 열매의 달라붙는 특성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것이 벨크로(매직테이프)입니다. 단추나 끈보다 쉽게 붙였다 뗐다를 할 수 있어 장갑이나 운동화, 잠바 등의 소매 끝에 붙은 ‘찍찍이’입니다. 사냥을 즐기던 스위스인이 개털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도꼬마리 열매의 갈고리 모양을 보고 착안하였답니다. 생물 모방, 자연이 준 최대 히트 상품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도꼬마리 씨앗을 한방에서는 창이자·이당·저이라 부르며 비염이나 축농증, 관절염 치료제로 사용합니다. 예전에는 도꼬마리 줄기와 잎을 고약처럼 만들어 종기나 두드러기와 상처 등의 온갖 피부병에 사용했으며, 잎을 말려 낸 가루를 술에 타 복용하며 감기나 두통을 치료했습니다. 

칠갑산 휴양림, 숲해설가의 집에서 도꼬마리 화살을 봅니다.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멀고 먼 곳으로 갔어야 할 도꼬마리 열매는, 어린이들의 자연물 놀잇감이 되었습니다. 바짝 마른 갈고리 가시일지라도,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과녁이 동물의 털인 줄 알고 찰싹찰싹 잘 붙기 때문입니다. 

숲속의 가을 여행도 막바지입니다. 식물은 동물과 다르게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지만, 1년 또는 일생에 한번은 여행을 합니다. 사람은 즐겁고 행복하려고 여행을 하지만, 식물은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절실함으로 여행을 합니다. 가능하면 부모로부터 멀리 떠나가려고 몸을 가볍게 하여 바람을 타거나, 더 붉은 열매를 만들어 새의 눈에 뜨이게 하거나, 물에 흘러가거나, 동물을 이용합니다. 부모나무, 큰나무와의 경쟁을 피해 살아나기 위함이지요. 내년 봄, 어쩌면 우리집 화분에도 도꼬마리 한 포기 숨어 필 듯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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