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0-11-27 11:53 (금)
노랑 빛에 물들다 – 오룡리
상태바
노랑 빛에 물들다 – 오룡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11.09 16:10
  • 호수 13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물안개가 아름다운 칠갑저수지를 지나니, 어리고 붉은 공작단풍 몇 그루가 길가 숲속에 섞여 예쁩니다. 붉은 지붕 뒤로 몇 그루 은행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는, 그림 같은 집이 산 밑에 있습니다. 둥그스름하게 구부러진 도롯가의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잎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사이로 마을이 보입니다. 용내·용바위·용왕물·청룡날·용둠범, 용에 따른 지명이 다섯 곳이 있습니다.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양의 명당도 있다는 오룡골, 오룡리 마을입니다. 
 

느티나무 갈색 잎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은행잎도 날리며 떨어집니다. 걷다 뒤돌아보다 걷기를 반복하며 떨어지는 잎을 맞습니다. 포장된 도로는 노란 점이 찍혔습니다. 나무 밑도 노랗습니다. 모여진 은행잎에 발을 푹 담급니다. 밟고 차고 뛰자 은행잎이 삭삭 소리를 냅니다. 노랑 빛깔 소리로 귀도 노래집니다. 

400살 먹은 느티나무를 올려보고 만져보고 맡아봅니다. 묵은 때 없이, 상처 난 곳 없이, 멋진 가지를 쭉쭉 사방으로 내밀었습니다. 누구에게든, 무엇이든 지 다 줄 수 있다는 모양새입니다. 오룡리마을 주민의 편안과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입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수북하게 쌓인 느티나무잎과 들마루, 나무 의자에 앉아 눈 부신 햇살을 받습니다. 

“독구실을 왜 찾어? 독구실 읍어진지가 은젠디. 중말? 중말이 뭐여? 이것이 용내 아녀? 자기 용둠범서 오는 물여.” 할아버지 머리 위로도 노란 은행나무 잎이 살랑살랑 날립니다. 
긴 도랑 안에서 물들어가는 고마리는 꽃만큼이나 예쁩니다. 풀 속의 벌레라도 잡아먹고 있었던지 작은 새떼들이 후다닥 날아오릅니다. 고마리의 작은 꽃이 피고, 길가의 연꽃이 필 때면 온통 향기로 감쌌을 길입니다. 모과나무 잎이 날리지 않도록 커다란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제 살을 벌레에게 먹이며 최고의 향을 뿜는 모과 열매는 여기저기에 떨어져서 곤충을 살립니다. 미끈한 가지에도 덩그러니 몇 개의 열매가 매달려 있습니다. 
 

대덕봉을 덮은 이불, 떡갈나무의 커다란 잎 사이사이로 1급수의 물이 생깁니다. 죽어서까지 물을 깨끗하게 하는 나뭇잎입니다. 떨어진 잎이 쌓이며 방울방울 물을 만드는 것이지요. 똑똑 떨어지는 물은 물끈을 만듭니다. 물끈은 작은 폭포에 다다릅니다. 대덕봉에서 내려오는 물끈은 용이 승천했다는 작은 폭포인 용둠범에서 흰 거품을 만들며 휘돌아 용바위로 흐릅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이 용둠범 만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용둠범에, 흑룡이 살았다는 용바위에, 단풍 든 나뭇잎이 날립니다. 둥둥 떠 흐릅니다. 돌 사이에서 단풍잎들은 서로 먼저 흘러가려는 듯, 모이고 제치고 밀려나고 휘돕니다. 가을볕을 받으며 할머니는 콩깍지를 까고 계시네요. 

잎을 다 떨군 검은 줄기의 감나무는, 이 나무 저 나무 비틀어지고 구부러진 모양이지만 한결같이 초연해 보입니다. 하나둘 몇 개의 까치밥을 남겨 놓았습니다. 한 그루 잘생긴 소나무와 포장도로, 연분홍 개여뀌, 동그란 향나무와 벌개미취, 허리가 뭉툭 잘린 단풍나무, 서리 맞은 색 바랜 꽃송이, 넓적한 둥치 의자와 굵은 줄기 의자, 날리는 느티나무 잎과 잎, 발소리에 놀라 도랑에서 허둥지둥 날아오르는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뭉치의 꽃가루라도 더 모으려고 꽃을 찾는 일벌들. 
바위에 망초꽃이 피고, 칠갑저수지를 향해 가는 물끈이 있는 곳, 달달 전동차를 타고 가시는 할아버지 등으로 오룡리의 신선한 바람과 햇살이 내립니다.
 

논길을 걷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에도 은행잎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논두렁에 홀로 앉아 있던 커다란 고양이가 발소리에 놀랐는지 달아납니다. 벼를 베고 난 자리, 뿌리그루에도 은행잎이 앉았습니다. 괜스레, 제풀에 겁을 내고 달리던 고양이는 길가의 경운기에 올라 낯선 방문객을 기웃거립니다. 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자 노란 바람이 입니다. 은행잎이 막 따라갑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행잎을 맞으며 노랑물이 들었습니다. 오룡리마을을 나오면 금방 노랑물도 빠질 테지만 그래도 새롭게 오늘을 색칠해 가는 것,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즐겁고 아름다운 선물은 아닐까, 가슴으로 머리로 떨어지는 은행잎을 맞으며 생각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