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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에 빠져들다 – 록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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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에 빠져들다 – 록평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10.26 11:44
  • 호수 13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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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윤동주 시 「새로운 길」부분

“물을 안 줘두 딘다니께 그러네” 빛 좋은 저녁 햇살이 밤색 함석지붕과 흰벽에 스밉니다. 할아버지는 길게 호스를 끌며 물을 주십니다. 대문 옆에 붙은 조그만 텃밭에 심긴 몇 뿌리 대나무잎을 닮은 약초입니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다니며 가을걷이를 하느라 힘이 들 텐데, 집에 와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한 마디 풀쑥 할머니가 던지십니다. “60년 살았는디, 징그럽게 구구자 딴 것 밖에는 읍네유.”  
붉고 희고 노란 꽃잎이 섞인 인동초가 울타리에 다닥다닥 피었습니다. 커다란 호박벌이 정신없이 꽃가루를 모으고 있습니다. 

녹평교를 건너 마을안길인 은골길을 걷습니다. 긴 그림자가 배추밭과 무밭과 파밭을 먼저 가고 있습니다. 추썩추썩 걷는 행동거지에 관산천에서 놀고 있던 황새가 화들짝 놀라 날아갑니다. 관산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무한천으로 갑니다. 노란 붓꽃이 활짝 폈던 이 길을 언젠가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길과 관산천의 경계는 노랗고 네모진 돌입니다. 돌 사이마다 대파나 상추 등을 심은 커다란 화분이 놓였습니다. 복지관은 담쟁이덩굴이 담장이 되었습니다. 고소한 냄새가 납니다. 씨를 수확하려 잘라 놓은 들깨풀의 밑동과 열매와 잎에서 올라오는 푸른 들기름 냄새가 은골마을에 퍼집니다. 
 

물길 건너에는 조그만 가마터모형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 피난 온 신자들이 토굴에서 진흙으로 그릇 만든 것을 계기로, 광복 후에도 옹기그릇을 구웠답니다. 햇살로 인해 더 붉은 황토가마에 검은 고양이들이 들락날락합니다. 맞은편에는 조그만 성당도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맨발 위에는 꽃 한 송이가 조각돼 있습니다.           
사천만이 살고 싶은 시범 마을이며 청정마을이라고 새긴 돌 표지석에 맑고 부드러운 빛이 스밉니다.
둘레가 7.7미터이며 7백 년이 넘는 보호수 느티나무를 한 바퀴 둘러봅니다. 줄기의 움푹 파인 부분을 시멘트로 메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그늘과 바람과 희망을 주었을까, 나무껍질 한 조각 한 조각에 은골과 관산골과 그 윗동네까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나무입니다.

옛날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더 옛날로 가고 싶은 마을 골목, 흙담이 있는 상록길입니다. 붉고 노란 담쟁이 잎이 흙담에 붙었습니다. 중간중간 가라앉은 곳도 있습니다. 100년 전 흙의 냄새를 맡고, 100년 전 흙의 감촉도 느껴봅니다. 삽살개가 그릉그릉 따라옵니다. 집집마다 엮은 마늘이 처마 밑에 죽 매달려 있습니다. 
드문드문 엎친 곳은 있어도 잘 익은 벼의 빛 고운 노란색에 눈이 멈춥니다. 논길에는 쑥과 씀바귀와 토끼풀이 불그죽죽 물들었습니다. 부드럽고 포근한 논길은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작은 풀벌레들이 들썩입니다. 추수하는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자니 마냥 부자가 된 듯합니다. 수확이 끝난 밭에서 남은 곡식을 찾아 먹던 까치들이 우루루 날아 전깃줄에 앉습니다.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 동네길, 골목길입니다. 집의 형태와 창문 모양, 길게 늘어지고 빈 빨랫줄의 빛바랜 집게,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나무, 낯선 사람을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어린이들을 대신한 동네 주인인 척하는 삽살개, 풀과 덩굴이 우거진 담벼락, 색색의 꽃이 수북한 화분 현관, 스치기만 해도 떨어지는 다알리아 꽃잎, 밤색 대문, 따 모아놓은 늙은 호박…. 
나뭇잎이 굴러다니는 의자에 앉아 푸근한 햇살이 퍼지는 골목을 봅니다. 제멋대로 길가에 놓인 경운기나 아무렇게나 던져진 폐타이어까지 정겹습니다. 적막하지만 적막하지 않은, 소소한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입니다. 마치 미술관의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것처럼요. 
 
아는 길도 천천히 걸으면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것처럼, 동네 길도 낯설면 여행길이 됩니다. 새롭고 즐겁습니다. 
은골길과 상록길의 한 조각을 걷고 나오는 길, 기둥 높이 자전거가 매여 있습니다. 높고 푸른 하늘 밑, 가남들판이 황금빛으로 반짝입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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