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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 - 정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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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 - 정자나무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08.28 22:03
  • 호수 13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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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여기 앉아서 조금 셨다 가슈! 낮잠이 막 깨셨는지 들마루에 누워 계신 어르신이 자리를 조금 내주십니다. 나뭇잎이 몰아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텁텁한 냄새를 맡으며 매미 소리도 듣습니다. 땀이 사라지고 여유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잠이 솔솔 옵니다. 

마을 어귀나 길가에서 크게 자라 그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 쉴 수 있도록 그늘을 주는 나무, 정자나무입니다. 큰나무 옆에는 의자 몇 개가 놓여 있거나, 정자를 세워 놨거나, 들마루를 놓기도 하였습니다. 정자나무는 주로 느티나무입니다. 느티나무는 빨리 자라고 가지가 넓게 퍼지기 때문에 그늘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나무신의 노여움을 사 재앙을 입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특히 느티나무는 함부로 베어지지 않아 아름다운 모양으로 긴 수명을 유지합니다. 말라 죽은 고목인 듯하다가도 이른 봄이면 연둣빛 새잎이 나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오고 가는 사람들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마치 솜털 같던 환상의 새잎은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자랍니다.
예전에는 싹 트는 잎을 보고 풍·흉년을 점쳤고, 나무의 형태에 따라 마을에 행운과 불행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에 신성한 영혼이 있다고 믿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나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소원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봉면 가는쟁이에는 4백 살이 돼 가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배(밑줄기)는 갈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회색입니다. 단단한 시멘트로 가려져 두툴두툴한 줄기를 만져볼 수 없습니다. 떨어지는 벼락을 맞았던지, 병충해를 입었던지, 바람에 의했던지, 상처 난 흔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굵은 가지를 내고 잔가지를 넓게 펼쳤습니다. 무성한 잎을 매단 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내리꽂는 햇살을 막아줍니다. 
시멘트 불룩한 배긴 하지만 나무는 흐뭇합니다. 비록 흉하고 큰 상처가 있지만, 봄부터 키운 가지와 잎이 누군가에게는 시원한 그늘과 바람을 주기 때문입니다. 

크레타섬 서쪽의 ‘아노보우베’마을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자라온 나무가 있답니다. 작고 조용한 마을 아노보우베를 넓은 세상과 연결시키는 올리브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가지를 꺾어 올림픽의 월계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올리브나무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4년마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주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나무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식물은 인간보다 완벽하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환경여건에 따라 성전환을 하며, 삶의 방식이나 수분 방식까지 바꿉니다. 판단능력이 있고 영혼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번도 교란을 받지 않은 숲이 없는 것처럼, 나무 역시도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환경에 따라 적응하는 것이겠지요. 가장 쾌적하고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따름입니다.   
올리브나무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상처받은 부분부터 일정 부분에 마디를 만들어 균이 더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랍니다. 나무 스스로 어린 가지들을 보호하며 치유하는 것입니다.  

마을 입구에서, 길가에서, 한쪽으로 치우치고 비틀린 나무를 자주 봅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주는 상처 입은 나무, 상처투성이지만 잘생긴 느티나무를 봅니다. 자신의 상처가 언제였었냐는 듯이 초록잎으로 자신의 종족이 아닌 남을 위하고 있습니다. 아파봤기에 타인의 아픔도 이해한다는 듯합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푸른바람 한 줄기가 몸속 깊은 곳에서 붑니다. 잎사귀를 뚫은 눈 부신 빛은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벽천리 잠수교 앞에도 상처 입은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밑줄기의 95%는 시멘트로 덮여 있습니다. 낮에는 새가 쉬었다 가기도 하고, 들고양이의 놀이터가 되기도 합니다. 빈틈없는 시멘트 가장자리 5%의 밑줄기에서 큰 가지가 뻗었습니다. 작은 가지도 뻗고 잎을 틔웠습니다. 이 나무에서만 낼 수 있는 향기와 소리를 들려줍니다. 
한쪽 발이 묶인 구름처럼 줄만 풀리면 금방 날아오를 듯한 나뭇가지. 금방 고부라져 쓰러질 가지 사이로 밤마다 별을 보여줍니다. 나무가 몸을 흔듭니다. 쏴아쏴아 잎사귀가 부딪치며 말합니다. ‘괜찮아, 오늘도 그만하면 됐어!’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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