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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자신감을 줍니다! – 양복장이 박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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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자신감을 줍니다! – 양복장이 박철훈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07.13 11:07
  • 호수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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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80년대에는 청양에도 25곳이나 있었어요. 그때는 하루에 열 명 이상 양복을 맞추러 오기도 했어요. 지금도 맞춤 양복을 찾는 사람이 더러 있어요. 단골손님이죠. 서울이나 천안에서, 홍성에서 양복을 맞추러 옵니다.” 
활짝 열어 놓은 양복점 정문 벽에 제비집이 있습니다. 새끼제비 두 마리가 내려봅니다. 
“세 마리는 자라서 둥지를 떠났어요. 올해는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봐요. 딱 50년 됐네요. 재단을 배우다 군대 갔죠. 백마부대 소속으로 월남에서 16개월을 복무했지요. 대전과 서울에서 일을 배웠고, 이곳에 양복점을 열었을 때 저쪽에 대전양복점이란 상호가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양복점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서양 사람의 옷 ‘양복’은 한일수호조약(1876년)과 함께 알려졌습니다. 1881년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갔던 김옥균 등이 양복을 입고 돌아와, 문명개화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입은 옷이라서 ‘개화복’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인이 서울 광화문우체국 앞에 ‘하마다양복점’을 최초로 열었으며, 1903년 한흥양복점을 시작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곳은 1916년에 개업한 종로양복점으로 3대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광복 이후 양복은 남성의 공식 옷으로 자리 잡고, 도시 근로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50~60년대는 맞춤 양복의 전성기로 옷감을 마카오와 홍콩 등에서 수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물찬 제비처럼 신사복을 쪽 빼입은 ‘마카오신사’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좋은 양복점은 좋은 옷감을 구비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구라파의 ‘라’와 견직물의 ‘사’를 합한 ‘라사’라는 명칭도 양복점 이름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청양에도 ‘예원라사’라는 양복점이 있었습니다. 시골집 안방의 횟대보를 들쳐 보면 대부분 걸려있던 양복은, 1970년대까지 크게 발전하였으나 경제 성장 후 대기업이 기성 양복을 대량 생산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복은 움직이는 예술!
넥타이가 걸린 벽 위에 가로로 긴 나무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색을 고르고 그림을 그려 만든 결과물은 어떤 방법으로든 움직입니다. 양복과 예술! 그랬습니다. 
“손님을 파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세상에 단 한 명뿐인 각자의 손님들에  맞게, 하나뿐인 양복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옷감 선택과 재봉 일은 그다음이죠. 사람마다 좋아하는 디자인이나 색이 다른 것처럼 체형도 다르거든요.”
“맞춤옷은 신체의 특성 하나하나를 잡아내 몸과 옷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몸의 단점은 가려주고 장점은 보여주는 것이죠. 물론 입은 모양도 좋아야 하지만 활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죠. 피로감까지 모두 해소되면 더 좋고요.” 

“옷감을 선택한 다음 채촌을 합니다. 팔길이, 가슴둘레, 진동 등 신체 치수를 재 종이에 옷본을 뜨지요. 채촌은 비슷한 시간에 몇 번을 재도 같은 수치가 나오지 않지요. 어깨 각도와, 앞으로 굽었는지 뒤로 젖혀졌는지 허리의 모양도 세밀하게 관찰해야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 수가 있어요. 옷본을 원단 위에 놓고 재단을 합니다. 마름질 된 원단을 가봉하고, 가봉한 옷을 입고 치수와 형태를 조정하죠. 그 후 손바느질로 원단을 한 땀 한 땀 꿰매는 본격적인 작업으로 들어갑니다. 단추 구멍 만들고 달기, 깃과 소매 달기, 다림질 등 마무리작업도 많아요.”

-정말 많은 손길에 성의가 더해지겠네요. 정장 한 벌에 3만 땀이란 소리가 이해가 갑니다. 가봉은 옷이 완성되기 전에 입어보고 교정하는 과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그렇지요. 가봉은 본래 시침질로 임시 바느질하는 작업을 말하는데, 가봉한 옷을 입어보는 것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요.” 
“옷을 찾아가며 흡족해하는 손님을 보면 가장 행복하죠. 얼굴 표정을 보면 고객이 얼마나 만족해하는지 알죠. 어쩌면 그 표정 때문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후회는 없습니다. 아내와 함께 삼 남매를 다 키웠으니 이만하면 고맙지요. 예전에 비하면 매일 놀고 있지만, 아직은 배운 기술로 옷 수선도 하고요.”. ‘아빠가 만들어 준 양복이 가장 편하다’고 말하는 자녀들에게도 늘 고맙습니다. 

-하기 싫을 때가 없으셨으니, 속상했던 일도 없으셨겠습니다.
“왜 없어요? 하루에 열 명 이상 옷을 맞추면 일이 잔뜩 밀리는데, 기술자들이 일을 안 하거나 그만두게 되면 많이 속상하죠. 손님들하고 약속한 날을 맞추려니…. 양복은 10년 정도 지나면 유행이 변해요. 윗도리의 트임이 양옆이냐 뒤냐로 변하고, 칼라의 넓이나 모양, 소매통이 유행을 많이 타요. 소매와 칼라가 생명이죠.”

-양복 한 벌 만드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지 궁금합니다.
“쉬지 않으면 바지는 하루에 3개도 꿰맬 수 있지만, 윗도리는 손이 많이 가서 바지의 3배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빨리한다 해도 5일은 걸려요. 배우는 것도 쉬운 바지부터 배웁니다. 오십 년을 했어도 어려운 것은 옷감 맞추는 것이지요. 체크 무늬 맞추는 것은 지금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내 양복요? 없어요. 계절별로 한 벌도 안 돼요.”

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양복
책꽂이에서 빛바랜 서적을 꺼내놓으십니다. 『이기봉재단전집Ⅰ·Ⅱ』, 이기봉복장연구소 발행 『입체보정전집』, 사람체형에 따른 재단법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박 사장은 개인지도를 해주신 스승 이기봉을 가장 존경합니다.
기성복에 밀려 구식이 된 맞춤 양복집을 찾는 사람은 드물지만, 오십 평생을 재봉틀과 바늘과 줄자와 다리미와 함께 지냈습니다. 반평생을 옷감을 자르고 꿰매면서도 단 한 번의 후회도 일탈도 딴생각도 없었답니다. 어떤 마음으로 옷을 만드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죠.”
손님 한 명 한 명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빛내줄 옷을 만들기 위해 재봉틀을 돌리고 바느질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그들을 감싸주는 부드러운 느낌을 제공하기 위해서요. 손님의 몸을 생각하고, 손님의 성격까지 닮은 옷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기는 하지만, 조용하게 사는 것이 좋은 세상이 아닌가요? 하루가 멀다고 시끄럽기 짝이 없으니.” 
대전에 있는 ‘기신양복점’에서 일해 보고 싶었다는 속내도 잠깐 보이시네요. 양복장이가 안 됐으면 가수가 됐을지도 모르는 박 사장은 박재란과 이미자를 좋아합니다. 삭삭대는 가위와 탈탈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박재홍의 노래 ‘향수’도 즐겨 들었습니다. 요즘은 당연히 트롯가수 정동원이 부르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축구도 물론 좋아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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