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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신문 30년 애독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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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신문 30년 애독자 인터뷰
  • 이동연 기자
  • 승인 2020.06.01 16:49
  • 호수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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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잃지 말고 미래 향한 힘찬 발걸음 내딛길

서른살, 스스로 선다는 뜻의 한자말 ‘이립(而立)’.  
시대가 비록 인터넷, 디지털화로 급변한다해도 아날로그의 종이신문 매력에 푹 빠져 있는 이들이 있다. 오랜 기간 변함없이 사랑해준 애독자들이다. 독자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먹고 올해로 30번째 생일을 맞은 청양신문. 강산이 3번 바뀌는 동안 청양신문을 애독해온 독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오탈자를 찾아라… 김명남(세종특별자치시)

가깝거나 멀거나 궁금한 청양소식 

이사 가도 궁금한 청양
“처가가 남양면 용마리 지초실이어서 자연스럽게 청양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청양군에 근무할 때는 근무지로 배달되는 청양신문을 접했었고 정기 구독한 지는 9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지금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세종시에 터를 잡았어요. 그런데도 오랫동안 보다보니 세종으로 옮겨서도 청양소식이 궁금하더라구요.”
김명남 씨는 교육행정직으로 정년 60세까지 충남·세종교육청 관내 초·중·고등학교 및 직속기관, 교육지원청에서 근무했다. 
첫 발령은 1981년 3월 1일 청양교육지원청 교육행정직으로 청양초등학교·청양농공업고(현 청양고)·정산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2017년 6월 30일에는 세종교육연구원에서 정년퇴직 했다. 현재는 세종특별자치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배움터지킴이로 일하고 봉사하며 소임을 이어가고 있다. 

기획·특집기사 즐겨봐
김 씨는 매주 다양한 소식을 가득 담은 청양신문을 기다린다. 지난주 발행된 신문이 한 주 지나서 배달돼 아쉽긴 하지만 지면이 늦다면 인터넷으로 청양신문 홈페이지(www.cynews.co. kr)를 통해 기사를 접할 정도로 애정이 크다.
특히 지역 문화와 지역민들의 삶, 세계 여러 나라의 여행기를 알 수 있는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김현락 지면평가 위원 재능기부)’, 기획취재를 즐겨 본다고 한다. 최근 기획취재 중에는 ‘지역의 문화와 이야기를 음식에 담다(이순금 편집국장)’ 시리즈를 챙겨볼 정도로 관심이 갔다고 한다.

“특별히 기억나는 기사를 꼽자면 제 장모님의 이야기를 실어준 제1285호 2019년 2월 25일 자에 실린 ‘일기 쓰는 흰머리 소녀 이덕순 할머니’(사진 오른쪽)입니다.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편에 나왔는데 고령의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꾸준히 일기를 쓰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몸이 좋지 않으셔서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면회도 어려워 보고 싶은 마음에 더욱 마음이 갑니다.”

김 씨의 또 하나의 특기, 오탈자 찾기. 저절로 관심이 가는 것을 천천히 읽다보면 보인다는 오탈자. 
비결에 대해 묻자 “비결이랄게 있을까요? 기관·단체장 등의 성명이 다르게 나오는 것은 청양에 15년 정도 근무해서 유명인사의 성명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요. 일반 기사 오탈자는 주의를 기울여 내용 전체를 읽다보니 보였어요”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김명남 씨는 30번째 생일을 맞는 청양신문에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청양신문 창간 제30주년과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사로 16년 연속 선정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외지에 사는 저에게는 지역과 주민 소식을 전해주는 청양신문의 전령사 역할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정치·경제·사회·문화·지역소식·기획 기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열정적인 취재로 공정하고 진실한 보도를 부탁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더 발전하는 신문이 되길 기원합니다.”

 

출향인 소식통…노재돈(정산 대박리)
청양의 거울 청양신문!

정산면 대박리에 살고 있는 노재돈 씨는 월요일만 되면 청양신문을 가지러 아랫집으로 내려간다. 산골짜기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우편물 배달에 불편함을 느낄 우편배달부에 대한 작은 배려다.
“신문을 언제부터 봤냐구요? 초창기때부터 봤죠. 청양신문이 처음 발간됐을 때 청양에 있었고 서울에 올라가서 장사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기록을 남겼죠. 지금은 이렇게 산골짜기에 집하나 짓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늘 챙겨봅니다.”

노재돈 씨는 서울명예기자 모임인 필봉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정산면 대박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1989년 서울로 진출했다. 당시 강경식 청양신문 회장이 청양군향우회를 이끌고 있었고, 노재돈 씨는 정산면 부회장을 맡았다. 편집국장이었던 김근환 대표이사가 향우회 취재를 다니던 중 서울명예기자 모임인 필봉회 결성을 권유했고 필봉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재경 정산초등학교 동문회, 재경 대박향우회 등 모임이 많았어요. 명예기자가 되고 나서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출향인 소식을 취재해 청양신문에 알리기도 했죠. 이후 향우회에서 출자금을 모아 신문사에 전달하는 등 청양신문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발 벗고 나섰죠.”

출향인들의 소식을 지역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노 씨는 가락시장에서 청양수산을 운영하다 2008년 청양으로 귀촌해 대박저수지 위쪽에 자리를 잡고 조상들의 선산을 지키며 노후를 이어가고 있다. 노 씨는 조용하게 살기 딱 좋은 곳이라 심심하면  돌탑을 쌓기도 하고 집 주변을 가꾸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청양신문이 있어 자랑스럽다
노 씨의 기억에 남는 기사는 매년 치러지고 있는 고추·구기자 축제 기사다. 청양의 자랑거리인 축제를 현장뿐 아니라 신문으로 접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는 것. 
“서울에서 장사를 했어요. 처음에는 쌀가게를 인수해서 하다가 외삼촌이 하고 계시던 당시 서울역 건너편 양동 뒷골목에 ‘굴도가’라고 불리던 곳에서 해물을 팔았어요. 요즘은 수산시장이라고 표현하죠. 주변 상인들에게 청양신문을 보여주며 고추·구기자 축제 기사가 실리면 열심히 자랑을 했죠. 그러면 상인들이 청양에는 이런 신문도 있고 이렇게 큰 축제도 하냐며 신기해했어요.”

노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지금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도 광고가 보인다며, 그때 그 시절에 이런 광고가 있고 생활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청양을 방문하도록 노력 했을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래서 항상 전시하듯 문 앞에 청양신문을 놔둔다는 그는 ‘누구나 와서 청양에 이런 신문이 있구나’ 하고 볼 수 있는 신문이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청양신문은 청양의 거울
그는 좋은 미담기사도 중요하지만 비판하지 않으면 언론이 아니라며 공정한 보도로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청양신문은 청양의 거울 같아요. 한 주에 일어나는 소식과 정보를 알 수 있고, 청양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노 씨는 청양신문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 이래 연속으로 16년 동안 선정됨에 있어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처음 시작부터 여러 고비를 넘겨가며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지금의 청양신문이 있고, 지역의 대표 신문으로 자리잡았음에 뿌듯함이 밀려온다고 덧붙였다.

노재돈 씨는 한동안 명예기자로 몸담았던 청양신문 30돌을 축하하며 “30년 간 쉼 없이 달려온 청양신문에 아낌없는 박수와 축하를 보내고 싶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30살이면 한창일 때입니다. 지나온 30년간의 발걸음을 되돌아보고 밑거름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길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길 바랍니다. 또한 지역을 위해 그리고 지역민을 위해 발로 뛰는 신문이 되길 기대하며 앞으로도 지역 곳곳의 소식이 골고루 전달될 수 있도록 처음처럼 최선을 다 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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