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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로 여는 세상! – 월송 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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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로 여는 세상! – 월송 이종철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20.05.11 10:58
  • 호수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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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한 방울 이슬에도 족함을 알고 어쩌다 입 열면 향기로 가득한’, ‘눈보라 헤집고 핀 매화, 님 기다리듯 꽃을 기다리고 님에 안기듯 향기에 취했네’ 유리창이 큰 월송화실에 걸린 난초와 매화작품입니다. 작품 오른쪽 상단의 화제(그림설명)를 소리 내어 읽어 봅니다. 감미롭고, 우쭐해지고, 또 고상해집니다.

넓은 책상 위에 화선지가 펼쳐있습니다. 소나무와 매화, 목단과 대나무는 알겠는데 넓적 잎은 무언가 갸우뚱하니 파초잎이라 하십니다. 
“병풍을 만들려고 십군자를 그리고 있어요. 십군자는 사군자에 소나무·목련·목단·포도·연·파초 등 육군자를 더한 것입니다. 실제 경치를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 한국화라면, 문인화는 첫 느낌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 매화도 꽃이 본래는 이렇게 크지는 않잖아요. 최대로 간결한 표현이 묵화의 특징이며 묘미입니다.”
그림의 기법이나 형태가 간단할수록 그 소재에 부여되는 상징적 의미가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랍니다. 볼수록 심오한, 생각을 자꾸 불러일으키는 힘, 그것이 간결함의 매력이겠지요. 

전문화가 아닌 순수문인들의 그림
“예전의 문인화는 글 쓰는 사람들의 그림이었습니다. 간단하고 서예의 기법을 적용하여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문인들에게 환영받았죠. 붓글씨를 쓰다 여유가 있어 글씨 대신 그림을 그린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문인화란 사물의 모양보다는, 자신의 철학을 나타내죠. 군더더기를 없애고, 수묵과 담채로 그리는 격조 있는 그림으로 평가합니다. 먹선이 생명으로, 쉬우면서도 가장 힘든 그림입니다. 본인이 표출하고 싶은 본질을 찾아 그리는 것이죠.”

“일생을 추위에 얼어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꽃이 좋아서 그림을 시작했죠. 주로 사군자를 그리지만, 매화를 엄청나게 많이 그렸어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었죠. 선(먹선)을 찾기 위한 노력 많이 했어요. 잡생각이나 마음이 흩어지면 그림이 안 돼요.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려고, 삿된 생각이 들지 않도록 늘 신경 쓰죠. 스트레스를 받거나 생각이 다른 곳에 빠지면 절대 안 그려져서 모든 걸 포기했어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요.”
“제가 지었습니다. 달빛 소나무란 뜻입니다. 쓸쓸함을 즐기며 사색에 젖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예요.”
30년 전에 표고 화랑을 운영하면서 그림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붓을 잡았다는 월송님한테서 묵과 종이 냄새뿐만 아니라, 쓸쓸한 냄새도 나는 듯합니다. 예술 하는 이 같지 않은 예술가, 선생님 같지 않은 선생님, 참 소박하고 겸손하십니다. 
 
“농담, 먹의 색 변화에 푹 빠지죠. 먹의 무궁무진한 색에서 마음에 꼭 맞는 색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난초는 진하고 흐린 곳 없이 먹으로 선만 그리는 백묘법으로 그리지만, 국화잎이나 매화의 줄기는 몰골법(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짙고 엷음만으로 형태를 나타냄)으로 그립니다. 대상에 따라 그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먹선과 농담 찾는 것이 힘들면서도 가장 매력적입니다.” 
“그림설명도 힘들죠. 문학적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책을 읽고 좋은 글이 있으면 메모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문구는 빌려 쓰기도 하고요. 그림은 좋은데 그림설명이 잘못돼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림에 맞게, 본인 사고에 맞게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죠.”
어렵네요. 저는 성격이 급해 서예는 말고 난 치는 것이 배우고 싶은데 가능하냐 여쭸습니다. 
“시작하면 되는 거지, 무슨 소질이 필요해요?

난초사랑, 난초향기, 난초군자
-그리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쩌느냐 여쭙니다. 
“미련 없이 버립니다. 저 난초도 그리고 또 그린 것 중의 하나예요. 그중 나은 것을 남기고 다 버리죠. 그러다가 마음에 쏙 드는 난초 그림이 나오면 바꿔 겁니다. 계속 그 일을 비교, 반복하는 거죠. 제일 많이 그리면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난초예요.”
 “수묵화가 서예의 필법에 따르기 때문에 사군자에서는 난초 그리는 것부터 배웁니다. 자유자재로 선을 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난은 ‘그린다’하지 않고, ‘친다’는 표현을 합니다. 붓을 끊지 않고 단번에 선을 그리죠. 남송말기의 사대부 정사초는 땅에 뿌리를 묻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으로 망국의 설움을 표현하여, 난초를 군자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죠. 저도 난초를 좋아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 덕이 높아 저절로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군자처럼, 난초도 산속에 홀로 피어 그 향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꽃은 적으나 멀리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향문십리’입니다.” 

-난초를 그냥 좋아하시는 것이 아닌 것 같네요. 완전히 짝사랑 같아요.
 “그래요. 추사는 ‘난을 그리는 것은 외모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정신상태를 그려야 한다’고 했어요. 난초는 조용하고 고고하고 고독하고, 다 좋죠. 자손 번창, 무병장수, 다산, 두터운 우정 등 좋은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축제장에서 조그만 가훈족자를 월송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당연히 난초 그림입니다. 집안에 난초를 걸어두면 사악함을 쫓아내는 벽사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겠죠. 

-한 작품 그리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난초 그림은 3분이면 돼요. 다른 작품도 1시간 정도요. 처음엔 밤새 그릴 때가 많았죠. 하룻밤에 5~60장 그리는 건 다반사고. 요즘은 그렇게 못해요. 작품은 한 번에 끝내죠. 두고두고 그리는 것이 아니고. 이것밖에 할 일이 없어요. 30년이 넘으니까 이제야 조금 되는 것 같아요.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런가. 그래도 마음에 꼭 드는 것을 아직 못 그렸어요. 정말 좋은 작품이 한 개만 나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리지만, 그게 그렇게 안 되네요.”     
인품이 높은 사람과 가까이하면 난초의 향기를 맡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품에 감화되어 각자의 인격완성에 도움이 되리라는 철학으로 난초를 그리는 월송님입니다.

“그냥 선하게 사는 거죠 뭐. 우리 세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효’라고 생각해요. 효에 관심이 생기면 도덕성이 회복되겠죠.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하네요. 허허실실로 사는 것이 좋지요. 남한테 피해 안 주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묵향보다는 카스향이 좋아요.”

-카스맛에 취해 그림 한 장요? 그럼 완전 술심이네요. ㅋ.
월송화실 입구에는 특별한 나무가 있습니다. 그곳을 한 번 지나간 사람이라면 쉽게 잊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늘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유난히 캔맥주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나무는 빛을 발합니다. 은빛 빈 카스맥주캔이 잎과 열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몇 시간을 꼼짝없이 흰 종이에 검은 먹물로 일필휘지하다 보면 시원한 맥주가 생각도 나시겠지요.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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