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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천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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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천남성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10.21 17:42
  • 호수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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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전환하는 붉은 열매

늘 봐도 기분 좋은 구절초가 칠갑산 가는 길에 활짝 폈습니다. 한 송이를 보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다른 한 송이가 얼굴에 기대옵니다. 막 신이 난 꿀벌들도 이 꽃 저 꽃에 정신없이 들이댑니다.  
상수리가 툭툭 떨어져 구르고, 아람이 벌어져 밤톨 없는 밤송이들도 하얀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산도 바람도 들꽃도 사람도 좋습니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등산로 옆 샛길 저 밑에 빨간 열매가 눈에 띕니다. 포도송이를 닮은 잘 영근 옥수수 모양의 붉은 열매입니다. 칠갑산 아니골계곡에서, 천태산 중허리쯤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워낙 강렬했던 붉은빛의 열매라서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냥 붉은 것이 아니라 숲 속 어느 곳에 있어도 눈에 확 들어오는 색입니다. 그러나 유혹의 색을 띠고 붉게 반짝이는 열매 곁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단단한 초록열매 때부터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서서히 붉게 익어갈 때까지, 윙윙대는 벌이나 다른 소소한 곤충도 새들도 동물도, 개미 한 마리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잎이 나고 꽃이 펴서 맺혀진 열매는 스스로 터지고 꺾이고 말라갈 뿐입니다.
 

천남성은 잎이나 꽃, 열매까지도 일반 식물과는 다른 독특한 모양샙니다. 지나치다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며 꽃을 쉽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잎인지 꽃받침인지 꽃잎인지 구별하기도 어렵습니다.
보라색 얼룩무늬가 있는 푸른 줄기 사이에서 굵은 꽃대가 올라옵니다. 연녹색에 규칙적으로 흰줄이 그어져 있는 대롱 모양의 꽃받침은, 길게 자라 챙모자처럼 꽃 위를 덮고 있습니다. 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꽃은 아닌가 추측하게 되는 겉부분입니다. 그 속에서 암꽃과 수꽃이 각기 아래위로 갈라져 막대기처럼 뭉쳐 있답니다.

천남성은, 암꽃과 수꽃을 번갈아 피우며 성전환을 하는 재밌는 식물입니다. 땅속의 비늘줄기가 작으면 꽃이 피지 않고, 어느 정도 크면 수꽃이 피며, 더욱 커지면 암꽃이 피며 성이 바뀝니다. 암꽃이 열매를 맺고 나면 이듬해에는 꽃을 피우지 않거나, 다시 성이 바뀌어 수꽃을 피운다는 것이지요.
식물도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많이 쏟습니다. 특히 천남성은 영양상태에 따라 좋으면 암꽃을 피워 열매를 맺지만, 영양분이 다 빠져 부실해지면 수꽃을 피우며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종족번식에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지녔지만, 스스로 적응하며 생존하기 위한 천남성만의 지혜입니다.
 한 해는 수꽃을 또 다음 한 해는 암꽃을 피우는, 이러한 성전환은 평생 계속됩니다.    

남성·호장·반하정이라 부르기도 하는 천남성은 잎의 모양에 따라, 둥근잎·점박이·넓은잎천남성이라 부릅니다. 남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긴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한 잎의 큰천남성은 청양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두루미가 날개를 펼치듯이 돌아가며 잎이 나는 두루미천남성도 있습니다.
모양새도 한 눈에 반할정도로 예쁘다거나 딱히 순해보이지는 않지만, 성분에도 강한 독성이 있습니다. 그냥 모르고 지나다 잎을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약한 사람은 가렵고 물집이 생깁니다. 붉게 잘 익은 열매는 독성이 아주 강해서, 닿은 부위가 마비되기도 하며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답니다. 그렇지만 알뿌리는 한방에서는 귀한 약재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같은 풀도 잘 쓰면 약이고, 잘못 쓰면 독이라는 말이 딱 맞는 식물입니다. 

모양새도 살아가는 방식도 이름도 독특한 ‘천남성’, 태양계의 남쪽에서 돌고 있는 떠돌이별이름 같기도 하고, 두근두근 첫 남성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열매를 비롯하여 식물 전체의 독성이 극에 가까워, 하늘에서 가장 양기가 강한 남쪽볕을 빗대어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집니다. 꽃을 싸고 있는 꽃받침이 뱀이 공격할 때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사두초’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리저리 돌아보니, 정말 뒤쪽에서 앞쪽으로 구부러진 뒷모습이 코브라 같기도 하네요. 

비밀·여인의 복수·현혹 등 꽃말도 보통 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정신을 쏙 빼앗을 만큼 고운 빛을 발하지만, 독의 향을 맡기라도 한 듯 곁으로 다가오는 날것이나 동물이 없으니 참 애가 탈 노릇입니다. 유혹에 넘어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깨달은 것이겠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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