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김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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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김나희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5.07 15:46
  • 호수 12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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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먹물 … 전봇대 김나희

서예는 점과 선‧획의 태세‧장단, 필압의 강약‧경중, 운필의 지속과 먹의 농담,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가 이루어지도록, 문자를 소재로 하는 조형예술이라고 친절하게 설명된 네이버의 글을 읽습니다.

“한석봉요? 잘 모르는데요.”
-아, 요새 친구들은 한석봉 얘기는 안 하죠?
“네. 그런 소리는 못 들었어요. 만화와 애니메이션 얘기를 많이 해요. 사실은 만화를 엄청 좋아하기도 하고요. 애니도 좋아해요.”
-만화책방 있어요?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보고 있어요. 아이돌그룹요? 좋아하지 않아요. 별루 관심도 없고요.”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느냐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입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OST를 즐겨 들어요. 만화를 하도 많이 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생각이 안 나요. 그냥 재밌으니까 보죠. 시간만 나면  보고 들어요. 공부 할 때 말고, 서예 할 때 말고, 놀 때 말고요.”
 
-아이스커피? 커피 맞아요? 맛없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다는 특징도 중2병의 하나라고 하던데, 나희학생도 그래요?
“아뇨. 저는 6학년 때부터 마셨어요. 엄마는 몸에 안 좋다고 마시지 말라 하는데, 저는 커피 좋아해요.”  
-지난달에 ‘제8회 면암서화대전’에서 학생부 최우수상을 타게 돼 기분이 어땠나요? 상금은 많이 받았어요?
“네. 큰 상이라 별루 기대도 안 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상금은, 글쎄 잘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예를 배웠어요. 시작은 엄마가 한자를 배우라고 한 것인데, 한자붓글씨를 배우게 됐어요. 처음에는 쓰기 싫고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 중학교 1학년 때 부터는 재미있어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정말 열심히 쓰고 있어요.”
“네. 토요일마다 정산면사무소에서 선생님들과 동생들과 붓글씨를 써요. 어느 날은 9시부터 연습할 때도 있고, 오늘은 11시부터 연습했어요. 4시에 끝나면 책상 정리하고, 조금 놀다가 교회 가요.”
-그 짬을 이용해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본다 이거죠?
“네. 시간 날 때요? 친구들하고 놀죠. 지금 해 보고 싶은 것은, 없어요. 별로 생각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밀가루음식을 좋아해서 그런지 키가 엄청 큼니다.
“팥만 안 들어간 빵이면 다 좋아해요. 172센티예요. 우리 반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각각 10명씩인데, 여학생 중에서는 제일 크고 남학생 한 명이 나보다 큰 친구가 있어요. 모델요? 그 생각도 해 보긴 했는데, 더 이상 키가 안 크는 것 같아서 생각 안 해요.”
“운동은 다 좋아해요. 탁구도 치고, 스포츠클럽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도 하고 있어요. 피구를 가장 좋아해요.”
-정적인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운동도 좋아한다 하여 혹시 농구나 배구를 좋아하는 줄 알았네요.
“음악도 좋아해요.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플롯을 배웠는데 좋아요. 재미있어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플롯을 연주하는 나희학생을 생각하니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언제 기회 되면 꼭 보고 싶네요.
 
나희학생은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씁니다.
-시를 써서 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도 시를 쓰나요?
“네. 처음에는 일기를 썼어요. 그러다 시도 같이 썼는데, 지금은 시작노트에 시를 쓰죠. 그냥 써 져요.”
-와우! 멋지네요. 상 탄 시는 어떤 내용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할머니가 김치국물을 흘렸어요. 그걸 도와준다는 내용의 시였어요.” 
-아, 할머니얘기군요. 혹시, 엄마랑은 친해요? 여행이라던가, 아니면 엄마랑 함께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엄마하고는 매일 싸워요. 엄마 성격하고 제 성격은 완전히 반대라서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그래서 어디 함께 가고 싶지 않아요.”

-서예를 배우면서, 물론 지금은 다 좋을 테지만, 그 중에 가장 좋은 것,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 얘기해 줄 수 있나요?
“먹향요. 먹이 갈리면서 내는 소리와 점점 까매지는 먹물, 다 좋지만 먹향이 가장 좋아요.”
-먹향요? 처음으로 웃네요.

‘傳家萬事皆須忍 敎子千方莫如勤’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것들 중에는 모름지기 참는 것이 다요, 자식을 가르치는 많은 것 중에는 부지런함 만 한 게 없다는 뜻이래요.”
학생부 최우수상을 받은 문장입니다. 한석봉이나, 김정희나, 왕희지는 몰라도 묵향이 좋다는 나희학생의 글씨를 봅니다.
날씬하고 키가 커서 별명이 전봇대입니다. 학교와 야간자습과 과외와 서예와 교회, 그리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고 듣는 중학교 2학년인 나희학생의 하루, 일주일 일과입니다.
“나중에, 공부 많이 해서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으면 좋겠어요.”

8년 동안 먹을 갈며, 올라오는 먹의 향을 맡으며, 먹물이 잘 묻은 붓으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썼습니다. 키가 자라는 만큼씩 글씨의 실력도 늘었습니다. 앞으로는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 한 겹 더 입혀졌으니, 더 힘차고 아름다운 글씨를 쓸 것입니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보기만 해도 먹향이 풀풀 풍겨 나오는,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인 김나희처럼, 그런 김나희체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델의 꿈은 버렸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눈으로 시를 쓰고, 그 시를 붓글씨로 써서 세상에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훌쭉한 키에 앙다문 입, 먹물이 묻은 엄지손톱을 봅니다. 함께 얘기 하는 내내 또박또박 말하는 입과 뚫어질 듯이 바라보는 눈빛은 ‘무서운 중2’가 아니라,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나희학생과 붓글씨를 생각하니 몇 십 년 전 서예를 배운다고 추썩대며 문화센터에 다닌 추억(?)이 떠오릅니다. 시를 멋들어지게 붓글씨로 쓰고 싶어서 멋모르고 서예를 시작하였습니다. 집에서 한 시간씩만 연습하라고 늘 선생님은 말씀 하셨지요. 먹 갈고 종이 펼치는데 50분 글자 연습은 10분, 여차저차 제대로 된 붓글씨를 써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크고 묵직하고 까만 벼루와 굵고 가는 붓 두어 개가 책상서랍 밑 칸에서 묵은 먹향을 토하고 있는 것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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