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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에서 철기 이범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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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에서 철기 이범석을 만나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3.11 11:02
  • 호수 12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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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청남면의용소방대장
▲ 중국 곤명 대석림을 방문한 청양군읍면의용소방대장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2월 11일 인천에서 늦은 밤 비행기를 타고 중국 운남성 곤명 공항에 새벽3시쯤 도착했다. 어두워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곤명은 평균해발 1800~1900m의 도시로 연중 따스한 봄 날씨를 유지하기에 ‘춘성’이라는 애칭까지 갖고 있다는 가이드 설명이 생각났다. 특히 밤하늘의 별을 보는 순간 방안의 천장에 별이 박혀 있는 것같이 가까이 보였다. 그만큼 깨끗한 공기를 자랑하는 곳이리라.

12일 오전에는 휴식을 취하고 서산으로 향했다. 이곳은 곤명의 서쪽에 위치한 산이라 해 서산이라고 한단다. 서산에는 용문이라는 곳이 있는데 72년 동안 3대에 걸쳐서 끌과 망치로만 판동굴이 있어 이곳을 거쳐야만 용문에 갈수가 있다고 한다. 이 동굴을 지나면서 곤명의 호와 시내를 관망하는 것도 장관이다.

13일에는 이번 여행 중 가장 보고 싶은 돌의 숲이라는 대석림을 방문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전동차를 타고 5분여 정도 가면 석림 입구가 나오고, 거기에서 조금 걸어가니 석림이 나온다. TV나 사진에서만 보던 곳을 실제로 와보니 대단하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낸다. 사찰이나 공원, 관광지는 인위적인 사람의 손길이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곳이 많은데, 석림은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보니 그 위용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대석림의 모습이 바다 속에서 융기되어 올라왔다니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석림에서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구황동굴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0m를 내려가면 동굴입구에 도착한다. 그런데 동굴 입구가 골짜기, 계곡 물줄기가 동굴 속으로 흐른다. 동굴 자체도 크지만 동굴 속에 폭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오다 야시장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내일을 위해 피곤한 몸을 눕힌다.

14일 오늘의 첫 일정이 금전이라는 가이드 설명을 듣다보니 주차장에 다다른다. 버스에서 내려 측백나무 같은 길을 따라 십 여분 정도 오르면 입구에 도착한다. 도교사원인 금전은 우당산의 태화궁을 본떠 세워 태화궁이라고도 부르며 청나라 강희제때 오삼계가 세웠고 250톤의 청동으로 지어져 동화사 또는 동이 햇살을 받아 금빛 같다 해 금전이라고도 한다.

▲ 육군강무당

금전에 향을 올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 대관루로 향한다. 곤명 서쪽에 있고 명나라 때 조성되어 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호수에는 갈매기가 있는데 우리나라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갈매기였다. 이곳은 내륙 깊숙한 곳인데 어디서 왔을까.
15일 마지막 날 호텔에서의 마지막 조식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들고 버스에 올랐다.
곤명시내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 도로가의 조경, 열대우림 같은 나무며 공원마다 피어있는 튤립·목련 등 이름 모를 꽃들이 ‘춘성’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린다.

오늘의 첫 코스는 원통사. 곤명시내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한국에서는 사찰을 가기위해 계단을 오르지만 원통사는 반대로 계단을 내려간다. 이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중생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란다. 이곳 역시 도교사원이었다.

다시 30여 분을 이동해 운남육군강무당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 중 개인적으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강무당에는 우리나라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독립투사 이범석 장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장군은 세종의 5남인 광평 대군 16대손 이문하의 아들로, 1915년 경성제일고등학교 졸업(박헌영·심훈 선생과 동창) 후 중국으로 건너가 손문의 추천으로 1917년 육군강무학교 기병과에 입학해 191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여기서 철기라는 호를 얻었다. 1920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중대장신분으로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 큰 공을 세운다. 이후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이후에도 대한유도회 초대회장(후에 용인 대학교로 개명)을 지냈다. 이처럼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인데 사드의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그 분의 사진이나 다른 모든 것이 없어졌다고 한다.

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맨 끝 구석에 이 장군의 조그마한 사진과 자서전(우등불), 이 장군 실화소설 톰스크의 여인들이라는 책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장군의 사진 오른쪽에는 중국으로의 망명년도, 졸업년도, 총리취임년도 등 어느 정도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반가움과 동시에 한 쪽 귀퉁이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 왠지 서글펐다. 그리고 중국어로만 되어있고 한글로의 설명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운동장이며 교실, 숙소 등을 다니며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어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러웠고 송구스러웠다.

3.1절이 지났다. 이런 분들의 헌신과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게 됐고 우리가 편히 살아 갈수 있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 해봤다. 중국 곤명으로 여행을 가고자하는 분이 있다면 한번 추천해 보고 싶다.

이런 뜻 깊은 곳으로의 여행에 도움을 주신 이일용 소방서장님, 한선희 연합회장님, 윤근원 여성회장님, 각 면대 대장님들에게 감사드린다. 뜻 깊고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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