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7 17:12 (수)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상태바
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2.25 15:32
  • 호수 128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기 쓰는 흰머리 소녀…이덕순 할머니

‘아가야 어머니 때문에 사람 노릇 하지 못하여서 이 직경 되었구나. 어머니 항상 너 때문에 자나 누나 걱정이다. 단단히 마음먹고 후사를 생각하여라. 동기간 소용 업서. 어머니 항상 걱정이요, 모든 거시 걱정이요.’
상추씨를 뿌리고, 마늘을 캤습니다. 요양사가 일찌감치 다녀가고, 가스통을 바꿔 놓았으며, 감자를 다듬었습니다. 잠겨 있는 현관문 앞에 온종일 앉아서 해가 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쓸쓸합니다.
공회당, 시락구, 감자꽁, 하양(함께), 짐치, 배차, 무수…「말모이」사전에나 나올 듯한 단어들로 꽉 찬 일기장. 97세 돼지띠 이덕순할머님은 지나간 달력 뒷장이나 굴러다니는 종이조각에 글을, 매일 매일 일기를 씁니다. 

호박꽃이 젤루 좋지
-2010년에는 가스 한 통이 3만5000원이었네요?
“물러. 그때 기억을 어떻게 헌대유.” 
“일기 쓰는 거? 아, 내나 알아보지 못 봐유. 뭐구 할 일 없어서, 일할머리 없으니께 써놨지. 애덜 다녀가면 쓰고, 꽃 피면 쓰고 배차 차면 쓰고, 감자 부쳐 먹으면 썼유.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앞에서부터 쓰기 시작헌 것이, 한참 애덜 클 때는 못 썼고, 또 작년부터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자주 못 쓰쥬. 쓸 줄이나 알간? 그냥 말 대로 쓰는 거지 뭐.”
“17살에 시집왔는데, 할아버지께서 마음을 못 노셨는지 3달 만에 편지를 보내 왔대유. 그 편지를 허리춤에 끼고 3년을 다니며 집 모퉁이 모퉁이에서 꺼내보고 읽고 베껴 쓰고 울고 웃고, 새라면 날아가서 할아버지 보고 싶구, 맨날 편지 보고 울었유.”
지금도 종종 할아버지 편지를 쓰십니다.
“그냥, 할아버지 목소리라도 듣는다고, 외워보고 써보는 거지유.”

“가지꽃, 오이꽃, 그중 호박꽃이 젤 좋지. 먹을거리를 주는 꽃이기도 하고”
박카스를 유난히 좋아하시는 이덕순할머님께 살면서 언제가 가장 좋으셨는지 여쭸습니다.
“애기 낳고 할 때가 그중 좋았지. 우리 시어머니가 밥 해 주고 할 때가. 보리방아 찔려면 시어머니 생각나고, 왕골자리 떨어지니 시아버지 생각나고…. 자식 낳고 산 것이 젤 잘 한 것 같기도 하고.”
“뭘 다시 태어나, 안 태어나, 죽어도 나는 안 태어나.” 좋아하는 호박꽃도 싫고, 무엇으로도 무조건 안 태어난다고 손사래를 치십니다.

흰머리가 젤루 싫어
“멋 내기를 좋아했어. 멋 부리느라 읍내 다니면서 차비랑 돈도 숫하게 쓰구.”
- 할아버지가 예쁜 여자 좋아하셨어요?
“그렇지는 안했어도, 내가 그렇게 멋을 부렸어. 나이 사십에 머리가 허옇게 셔 버렸네. 미장원에 가 염색을 하고 와 김장밭을 만지고 있으니 얼굴이 퉁퉁 붓고 벌개지고 야단났네. 옆집 아저씨가 보더니 큰일 났다고 빨리 방에 가서 눕지 그러고 있다고 호통을 치고, 그게 옻 타서 그랬더라구. 그 뒤로는 미장원에서 당체 염색을 안 해 줘유. 그래서 어느 날은 내가 머리에 먹물을 발랐어. 그러고 잤더니 어매나 글쎄, 요에 시커멓게 검은물이 든 거여. 그래서 수건으로 덮어 매고 별 짓을 다 했지. 흰머리 땜에 별짓을 다했어. 지금도 흰 머리가 그렇게 싫을 수가 읍슈. 아주 젤루 싫어.”
- 왜 할아버지가 머리 하얘서 싫다고 하셨어요?
“아니, 아버지가 보기 싫다고는 안했지. 지금처럼 입 맞추고 그러지는 안했지만.”
숱 많은 흰머리에 머리띠를 하시고 그 위에는 핀이 세 개나 꽂혀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자’십니다.

쓰고 쓰고 또 쓰고
‘동지달2십4일 음력10월3일 - 발등 아퍼 하루 저녁 밤새우고 부탄가스 불 다린 호미로 지지여서 나섰구나. 병원 가 주사 맞고 연고 바르고 별짓 다 하여도 낫지 아니하여서 어머니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불 땝니다. 4년 전 버텀 아퍼 있어 정월에 한 번 또 3월 26일 발등 압퍼서 욕보는데 이게 무슨 병인가 잘 모르 것서 잠을 못자고 밤 새웠구나. 어머니 발등이 늘 고생이구나.’
상상도 못 하는 민간요법으로 아픈 발등을 지집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 말씀을 새겨들은 것이 지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5월에는 슬픈 일이 있으셨습니다.  
‘5월2일 - 보리감자 밭 매고 집에 가구서는 영원이 집에 못 오넌구나, 어머니 보고 싶어 항상 눈물 나넌구나.’
 
‘6월10일 음력4월24일 - 민주항쟁의 날, 가스 넣어 25일 쓰고 말랐습니다. 또 다시 35,000원 주고 넣었습니다.
6월19일 음력5월4일 - 마늘 수확하였으며 종콩 심었지 들깨 모종하였지 다른 것은 못 허였슴이다. 새암 앞에 마늘 놓은 것이 많이 안 들었구나. 약 자세 아니 허구 보니 버러지 실려서 잘 아니 들었구나. 내년에나 잘 헤어 먹고, 다마네기 3접 되었구나.
유月26일 음력5月22일 명순이생일 - 어머니 몸 아퍼 수제비 사다 먹었슴이다. 그러나 낫지 안이 허는군요. 어머니 항상 몸이 게루워서 눈물 나넌군요. 보면 반갑기는 허지만 잘 해 주지 못하여 죄송허구나. 가니 서운하구나.’

무채색, 액자소설 일기
‘2018년01月열하루 동짓달25일 - 전기금침을 하였슴이다. 눈이 3일간이나 와 운동화발자국 보고 짐작으로 전기금침 혜 갓 것지 하고 있슴이다.
섣달21일공일 - 자꾸 마음이 심난합니다. 어머니 그 사람 보면 왜 눈물이 나는구나. 
2월3일 토요일 - 흰떡 2말3되 하였지만 조금씩 나눠 주고 나니 그것도 넉넉하지가 않구나.
3월 춘분날 - 청년회에서 누룽지와 선물을 갔다놓고 갑니다. 어머니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4월4일에는 이미용권이 다섯 장이 나왔고, 4월20일은 장 다린(담근) 날이며, 22일에는 콩 심고 농약을 하였습니다. 동짓달 15일부터는 참나무를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해 여름은 온통 마늘 때문에, 어느 해는 김장배추 모종 때문에, 또 발등으로 어머니 마음이 늘 불편하십니다. 그렇게 저렇게 보낸 하루하루의 마지막 날은 그래도 늘 아쉽습니다.
‘양력 정월 끗났슴이다’   
 
“올해는 목화솜 타서 이불 해 덮고 싶다”며, 읍내에 솜틀집이 어디쯤 있느냐 물어보시는 이덕순할머님. 오늘 일기에는 목화꽃에 대해 쓰실까, 아니면 막 오고 있는 봄소식에 대해 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다녀갔다고 흑백사진 같은 글을 쓰시겠지요. 멀거니 눈물이랑이진 자리에 붉은 노을이 번집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