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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겨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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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소박한 사물과 사람들...겨울눈
  • 청양신문 기자
  • 승인 2019.01.21 14:05
  • 호수 1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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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상이 담겨 있는 작은 생명체 …겨울눈

다이아몬드 무늬가 있어 나무껍질이 아름다운 은사시나무를 생각하다, 회색빛 도화지에 한 줄 한 줄 흰 물감으로 줄을 그은 것 같은 숲을 봅니다. 흰 껍질이 매력적인 자작나무로 이루어진 숲은 먼발치에서도 눈부십니다. 
 
잎이 진 자국위에, 잎 없는 나무 가지 끝에 도드라지게 붙은 씨앗 같은 겨울눈을 봅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만드는 겨울눈은, 월동아라 불리기도 하며 겨울을 잘 보낸 후 봄에 새싹을 내 보냅니다. 

모진 계절을 견디는 겨울눈 속에는 식물의 가장 어리고 연한 조직이 들어있습니다. 가지 맨 끝에 있으며 가장 큰 눈인 꼭지눈은 보통 사람이름 같은 ‘정아(頂芽)’라고 부르며, 봄이 되면 줄기와 꽃, 잎이 될 부분입니다.
정아 바로 밑에는 양옆으로 곁눈인 ‘측아’가 있고, 측아보다 더 작은 눈인 ‘피목’이 주변에 있기도 합니다. 줄기껍질 속에 들어 있다가 위급할 때 터지는 잠자는 눈 ‘잠아’도 있습니다. 여러 눈 아래에는 지난해 잎이 달렸다 가을에 떨어진 흔적인 ‘엽흔’이 있으며, 엽흔 속에는 양분을 날랐던 관다발의 자국도 까만 점으로 남아있습니다. 메마른 가지 하나에도 양분을 나르고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치는 세상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생물들에게 겨울은 가장 혹독하고 잔인합니다. 추위를 막기 위해서 겨울눈은 단단한 채비로 확실한 무장을 합니다. 보드라운 털로 감싸는가하면, 기름기를 바른 듯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치 우리들이 두꺼운 가죽옷을 입거나 따뜻한 털옷을 입고 겨울을 보내는 것처럼요.

나무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겨울눈을 만들므로, 종류에 따라 겨울눈은 크기나 재질‧모습‧역할‧위치도 각기 다릅니다.
떡갈나무나 참나무의 겨울눈은 비닐같이 겹겹이 덮였으며, 버드나무의 겨울눈은 털이 무성합니다. 여러 겹의 껍질로 싸인 벽오동, 털과 송진으로 둘러싼 곰솔(해송), 침엽수는 여러 겹의 끈끈한 기름으로 둘러싸였으며, 한국특산종으로 지리산에서 잘 자라는 히어리는 2개의 보드라운 비늘로 싸여있습니다.
짙은 밤색의 가죽옷을 입은 겨울눈이 있는가하면, 회색빛 발굽모양의 겨울눈도 있습니다.
공원마다 한 그루씩은 꼭 있는 백목련을 올려봅니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출렁대는 연회색 털옷을 입은 겨울눈은 막 피려는 꽃봉오리 같습니다.
 

겨울눈은 꽃으로 피어나는 꽃눈이 있으며, 잎으로 펼쳐질 잎눈, 잎과 꽃이 함께 들어있는 섞임눈이 있습니다.
잎눈은 잎의 함축된 정보를, 꽃눈은 꽃의 함축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작은 생명체입니다.
꽃눈 속에는 이미 다 만들어진 모양의 꽃잎이 숫자만큼 차곡차곡 포개어져 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진달래, 개나리처럼 봄이 오자마자 환하게 꽃피는 나무들은 이미 꽃으로 피울 꽃눈의 분화를 마친 상태로 겨울을 납니다. 자기들만의 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겨울부터 부지런히 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봄 세상을 화사하게 만들기 위해 삭풍과 추위를 견디며 준비하는 나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봄나무들의 꽃폭죽이겠지요. 한낱 식물에 불과한 꽃나무일지언정 한 송이 꽃도 겨울을 잘 참아낸 자연의 축복 이상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참고 지킨 노력의 결과인 것이랍니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를 것 없듯이 지난해와 새해 역시 평범한 일상이지만, 해를 바꾸어 의미 있는 새날로 새로운 한 해가 나무들에게도 덥석 왔습니다.
시작을 알리고, 새순을 보호하고 있는 겨울눈은 나무의 성장 과정 중 가장 용기 있고 책임감 있으며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 작은 우주입니다. 
겨울의 추운 기운과 쌀쌀한 바람을 겪어낼 겨울눈이 없으면, 나무들은 찬란한 봄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눈은 춥고 무섭고 어려움의 상징인 동시에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명자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빨간 꽃눈이 맺혀있습니다.
봄꽃들이 한바탕 피었다 질 때쯤이면 서서히 꽃잎을 펼치기 위해, 겨울 찬바람을 이기며 준비하는 명자꽃 겨울눈, 앙다문 꽃눈 그 속에는 몇 장의 꽃잎이 꼬물거릴지 궁금합니다.  
<김현락 지면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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