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7 17:12 (수)
출향인 탐방-이형집 케이엠피주식회사 회장
상태바
출향인 탐방-이형집 케이엠피주식회사 회장
  • 이순금 기자
  • 승인 2017.02.20 18:18
  • 호수 118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금속인쇄 분야 거목 ‘50여 년 한 길’

오늘은 한국 최고의 금속인쇄 전문 회사인 케이엠피주식회사(아산시 둔포면 소재)의 창업자 이형집(80·화성면 화암리 출신) 회장을 소개한다.
1967년 창립한 케이엠피는 최고의 기술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지난 50년간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금속인쇄산업을 선도해 왔다. 이 회장의 뚝심과 강한 정신력, 신뢰가 힘이라는 한결같은 마음이 그 밑바탕이 됐다.
이 회장이 올해로 팔순을 맞이했다.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케이엠피는 50주년을 맞았다. 이에 이 회장이 팔순과 창업 50주년을 기념하며 자서전 ‘나의 금속인쇄 50년’을 발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금속인쇄 회사로 우뚝 선 케이엠피와 이를 이끄는 이 회장을 소개한다. 

가난한 고학생의 ‘주경야독’
이 회장은 화성면 화암리가 고향으로, 5남 3녀 중 여섯째다.
그는 진달래꽃 살구꽃 복숭아꽃 등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는 오서산 자락 아름다운 꽃뫼골에서 태어나 화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모 집에서 기거하며 광천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생각하며 혼자 상경했다. 17살 때였다.
“친구가 서울로 고등학교를 간다고 해서 따라갔죠. 아버지께서 상업학교를 권하셨지만 거역했습니다. 친척도 없고 모든 것이 어려웠지만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죠.”
가난한 고학생이 된 그. 고교 입학금은 시골집에서 가져다 냈지만, 그 나머지는 직접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며 신문배달과 가정 방문으로 학용품을 팔았다.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로 어림없었고, 결국 야간고등학교로 옮기고 직장을 잡게 된다.
“원래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색맹으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일반고에 입학해 다니다, 야간으로 옮기고 아르바이트가 아닌 목공소에 취직해 일을 했죠. 밤에는 공부하고요.”

1967년 대성금속인쇄공업사 창업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친 그는 동아금속인쇄공업사 견습공으로 입사했으며, 그곳에서 인쇄 전반을 배우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쇄인으로서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인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세 번 있었어요. 공업고 입학·군 장교 임용·경찰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모두 색맹으로 불합격했죠. 합격했다면 다른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1년여 후 고교를 졸업한 그는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부산에서 친구가 경영하는 금속인쇄소에 취직해 인쇄 일을 계속 이어나갔다.
1964년 광천이 고향인 신월현(78) 여사와 결혼한 후에는 서울로 가 대동금속이라는 공장에서 일했고 부인과 최소 비용으로 생활하며 돈을 모았다.
부인이 직원들의 밥을 해 주는 조건으로 회사 사무실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남보다 일찍 출근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렇다 보니 모두에게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결국, 결혼 3년 만에 30만원(현재 6000만원)을 모았고, 대성금속인쇄공업사를 창업할 수 있었다.
“창업을 항상 꿈꿨고 결국 꿈을 이뤘죠. 1967년 2월,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 이형집 회장이 KMP에서 금속인쇄한 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시련은 모두를 더 단단하게 했다
창업자금 30만원은 큰돈이었지만 회사 운영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선 두부공장이던 허름한 곳을 얻어 간판을 달고, 5명을 뽑아 기술을 가르쳤다. 그는 거래처를 찾으러 다녔다.
“시련이 몇 번 있었어요. 첫 번째가 2년차였죠. 첫 거래처에 캔을 도장해 납품했는데, 얼마 후 직접 인쇄를 한다더군요. 그래서 다른 거래처를 찾아다니다 쓰러져 대수술을 받았죠. 이후 구두약 인쇄를 시작했는데 물량이 너무 적었죠. 2년 차 6월이었고 회사를 정리하려는데 직원들이 힘을 줬어요. 이후 캘린더 인쇄 수주를 받아 부채를 갚고 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3년 차부터는 소득이 수직상승했다. 직원도 늘고 공장 규모도 늘려 성남을 거쳐, 아산 현 위치로 이전했다. 그러다 두 번째 시련을 맞았다. IMF 때인 1998년으로, 아산 공장에 들인 최신기계설비 차관이 문제가 됐다. 회사가 도산 위기까지 몰렸다. 하지만 다시 직원들과 헤쳐나갔고, 1년 만에 본 궤도로 돌아왔다.
세 번째는 2004년 금속노조가 회사에 설립되면서다. 그는 동종 업계에서 급여수준도 높고 복지후생도 잘돼 있다고 자부해 노조가 생겨도 문제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직장 폐쇄까지 치달았다. 거래처는 떨어졌고, 당연히 회사는 적자였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고, 3년 후 회사는 다시 살아났다. 거래처가 다시 돌아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노조가 생기기 이전 매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달된 것이다.
“시련을 겪으면서 회사가 더 단단해지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직원들이 저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현재에 이를 수 없었겠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는 소득이 수직상승하던 3년 차에 사업 확장을 위해 큰 처남인 신백현 회장과 동업을 시작했고 몇 번의 시련도 함께 견뎠다. 이후 2015년 5월 신 회장이 9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45년간 항상 든든한 동업자였다고 전했다.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으로
대성금속인쇄공업사는 2000년 ㈜대성엠피씨, 2013년에 다시 KMP(Korea Metal Printing) 주식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계 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2014년 6색도, 올 2월에 8색도 인쇄설비를 추가 도입해 세계 제일의 인쇄공장으로 한발 더 나갔다. 선진국보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뉴질랜드, 미국 유럽 등 세계에서 참치 캔 및 분유 캔 인쇄를 수주할 수 있었다.
“2012년 500만 불, 2015년 1000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어요. 올해 2000만 불 수출의 탑 수상목표입니다. 국내에서도 현재 40여 업체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저희는 한 번 거래를 시작하면 거의 중단되는 일 없이 지속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부분 채워가면서 세계 제일의 금속인쇄 전문회사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1967년 직원 5명으로 출발한 KMP는 이제 직원 160명, 연매출 500억의 회사가 됐다. 금속 인쇄 전문회사로는 국내 최고, 세계 5위 안에 드는 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아내의 내조가 가장 큰 힘
이 회장은 부인이 없었다면 지난 시간을 헤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창업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단다. 이해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줬기 때문이다.
“사무실 한쪽에서 자고 직원들 밥을 해주면서도 불평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회사 규모가 작았을 때는 필요한 소품들을 집에서 만들어 줬고, 어려울 때면 자금을 먼저 구해다 주었죠. 성공의 7할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1남 2녀를 두었고 모두 가정을 잘 꾸리고 있어요. 잘 성장해 준 아이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해 주고 싶네요.”

▲ 인쇄공정을 살펴보고 있는 이형집 회장.
성공한 사업가인 이 회장은 이웃을 위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1970년 대 초반부터 고향인 청양과 중학교를 다녔던 홍성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고향 노인정에 텔레비전 보내기, 마을 안길 포장지원, 파출소 신축 지원 등 봉사를 이어갔다. 청양군에 애향장학금 1000만원 기증은 물론 2016년에는 청양인재육성장학금으로 1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곳곳에 많은 장학금을 지원했다.
사회활동도 활발했다.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 동창회장, 화암초 총동창회 3대 회장, 재경청양군민회 16~17대 회장, 충남기업인연합회 초대 회장 등도 맡아 그 역할을 다했다. 1991년부터 라이온스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2004~2005년에 354-C 지구 총재에 당선돼 큰 봉사를 실천했다. 그 유공으로 국제회장 1등 공로 메달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으로 계속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그의 창업 이념은 ‘정직하자, 신용을 지키자, 약속을 생명같이 소중히 하자, 나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였다.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이것을 지켰다. 그 결과 현재의 KMP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저희 회사에는 30년 이상 근속자가 많아요. 거래처도 30년을 넘긴 곳들이 많죠. 신뢰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 마인드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 다짐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형집 회장의 마지막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