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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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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사진첩
  • 김현락 재능기부
  • 승인 2016.10.24 11:28
  • 호수 11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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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가르며 귀신 쫒는 곡물 '수수'

바람이 한결 선선해진 잠수교를 지나 넉배로 가는 녹색길에 들어서자, 단풍을 더 곱게 물들이고자 비가 내립니다.
풀잎 위로, 찢어진 코스모스와 길게 목 빼고 피어있는 들국화 꽃잎 위로, 비닐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부서지는 소리는 홀로인 길을 더욱 한적하게 합니다. 
 
가늘고 긴 잎이 몸을 휘감으며 비를 맞고 있는, 
다른 식물들보다 훤칠하여 깊고 푸른 마디가 시려 보이는 수숫대 앞에 섭니다.
통통 영글어가고 있는 수수알도, 꽃을 피우려고 하는 어린 이삭도 비를 맞고 있습니다.
두 개로 갈라진 노란 암술머리의 꽃이 바람에 흔들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합니다.

벼과의 외떡잎식물인 수수는 고량주의 주원료로 이용되며, 조‧피‧기장 등과 함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알곡작물입니다. 
오곡 중의 하나로 특히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짓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곡물이지요.
수수는 주로 밭 주변에 심지만, 생태적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척박한 땅이나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습지대와 바람이 세게 부는 지역에서도 잘 자라며, 조생종은 벼과에 속하는 작물 중에서도 생육기간이 짧아 파종 후 80일이면 수확이 가능하며, 고랭지와 개간지의 작물로 이용됩니다.
줄기 끝에 달리는 이삭은 품종마다 달라 몰려있거나 퍼져있거나, 곧게 서거나 숙이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한로가 지나면 원뿔형의 꽃차례에는 많은 꽃이 빽빽하게 피기 시작합니다. 
암꽃은 꽃대가 없는 타원형으로 가느다란 끈 같은 꽃술에 매달려 피고, 이삭에는 긴 까끄라기가 있으며, 각 마디에 대가 있는 수꽃이 1~2개씩 달립니다.
영글어가는 수수알은 흰색과 노란색과 갈색과 붉은 갈색을 띱니다. 
길을 지나다보면, 붉은 갈색으로 잘 익어가는 수수이삭에 새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비닐을 씌워 놓은 수숫대를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씨앗을 구성하는 조직인 배젖의 녹말성분 차이에 따라 메수수와 찰수수로 나누는 수수는, 색이 붉어 어린아이 돌상이나 생일상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수수팥단지나 익반죽한 찰수수 경단을 삶아 팥고물에 묻힌 수수경단으로, 못된 귀신의 접근을 막아 아이가 낙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기원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 자라서도 종종 넘어지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돌 때 수수경단을 못 얻어먹어 넘어지느냐는 농담도 그래서 생겼답니다.
녹두소를 넣어 반달모양으로 접은 다음 기름에 지진 수수부꾸미가 갑자기 먹고 싶어집니다.
수숫대 한 마디를 툭 잘라서 단물을 빨아 먹던, 잘 영근 수수이삭을 잘라 밥솥에 쪄 먹던 기억도 슬그머니 떠오릅니다. 그런 날에는 하얀 밥에 보라색 수숫물이 곱게 들곤 하였습니다.
 
바람과 함께 어우렁더우렁,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수숫대를 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를 보니, 몇 십 년 전에 상영됐던 ‘붉은 수수밭’이란 중국영화가 떠오릅니다.
양조장에 팔리듯 시집간 한 여인과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중국 민초들의 삶을 그린 영화였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수수밭과, 피로 물든 수수밭과, 타는 듯한 붉은 해가 극장을 꽉 채웠던 화면 몇 장면만 생각이 납니다. 
 
노랗게 잘 익은 벼논을 앞으로 두고, 하얗게 피고 있는 갈대숲을 뒤로 한 채 수숫대가 나란히 서서 비를 맞으며 흔들립니다.
이 비가 그치면 들판은 더욱 휘휘해질 것이며, 녹색길과 넉배 또한 붉고 누렇게 계절이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람과 함께 찾아들 햇살은 비에 젖은 풀들을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누웠던 풀들이 일어나듯이,
아랫녘 태풍의 피해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도 빨리 일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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