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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취재] 지역경제 활성화의 대안 ‘슬로시티’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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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취재] 지역경제 활성화의 대안 ‘슬로시티’ ⑤
  • 이진수 기자
  • 승인 2015.12.07 10:25
  • 호수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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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고유자원과 슬로푸드가 죽은 도시 살려

[글 싣는 순서]
1. 슬로시티란 무엇인가? 어떻게 선정되나?
2. 경북 청송군 부동·파천면 슬로시티
3. 전남 완도군 청산면 슬로시티
4. 국제슬로시티 발상지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5. 슬로관광과 슬로푸드(치비타, 오르비에토)
6. 지역경제와 슬로시티, 청양군은 어떻게 하나?

‘천공의 성’에서 맛보는 슬로푸드
로마를 빠져나와 차로 2시간이면 국제슬로시티의 중심지 ‘오르비에토’를 방문할 수 있는데, 그곳에 가기 전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있다. ‘치비타 디 반뇨레조(이하 치비타)’라고 하는 도시다.
치비타는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될 만큼 아름답다. 다만, 이탈리아 안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오르비에토에 가는 관광객들이 스치듯 들르는 곳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입이 쩍 벌어지는 멋진 경치 탓이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먹기 힘든 이탈리아 변방의 전통음식(슬로푸드)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바위산 위에 요새처럼 세워진 치비타는 멧돼지 고기와 송로버섯이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주변의 식재료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이해가 쉽다. 이곳은 자동차로 좁고 굴곡진 비탈길을 40분가량 달려야 가까스로 마을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가파른 협곡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마을은 마치 공중에 붕 떠있는 듯 산봉우리에 있다.
변방이기는 해도 주변이 온통 산이라 산림자원(먹거리)이 풍부하고 비탈진 언덕엔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흔하다. 오랜 도시국가로 독립적인 터전에서 살았던 이탈리아의 역사(이탈리아의 통일은 불과 140년 전)와 이곳 지형을 중첩해 보면 자급자족의 문화를 금세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이 대도시와 떨어져 있지만, 가구 수가 상당했던 이곳 치비타는 기원전 에트루리아 민족의 동굴과 중세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산봉우리 위에 만들어진 마을은 들고나는 길이 단 하나뿐이다. 현재는 12명의 주민만이 이곳에 살면서 전통음식과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라 피아제타’ 식당은 앞마당이 넓어 야외 식사에 제격이다. 이 식당은 마을에서 생산된 식재료만으로 다양한 음식을 만든다. 로마에서 맛봤던 음식과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백한 맛이 한국인의 입맛과 잘 어울려 친숙함에 오히려 놀라게 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맛이 절로 생각날 정도다.

▲ 치비타에에서 생산된 모든 제품에는 치비타 마을의 사진이 붙어있다.
빵에 생토마토를 얹은 애피타이저, 오븐에 구은 동그랗고 평평한 빵 포카차(피자 도우와 비슷한 맛), 콩을 이용한 스프의 한 종류인 파졸리니, 한국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라자냐(라자냐도 파스타의 한 종류)를 비롯해 2~3가지 종류의 파스타를 맛볼 수 있었다. 음식이 짜거나 맵지 않고 면과 빵, 채소가 주 재료다. 로마의 파스타나 피자에 짠맛이 강한 것과 비교된다.

그 중 탈리아텔레(칼국수처럼 납작한 모양의 면) 파스타 면을 사용한 요리는 이 지역 특산물인 송로버섯(트러플)이 들어있어 향이 풍부하고 독특하다. 세계 3대 식재료로 알려진 송로버섯은 푸아그라나 달팽이 요리를 능가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기 때문에 로마에서였다면 가격이 상당했겠지만 이곳에선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식당 라 피아제타의 주인 비엘라 씨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정말 다양하다.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방문객들은 천상의 맛을 느낀다. 그것이 이 작은 마을을 관광지로 만든 주역”이라고 설명했다.

식재료 가공 최소화…본래 풍미 즐겨
비에라 씨의 안내로 들어선 식당 뒤편의 식품판매장에는 지역에서 생산되고 가공된 다양한 제품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송로버섯 향이 가미된 올리브유,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과 발사믹(와인 식초), 여러 가지 견과류와 과일향의 증류주, 멧돼지 고기로 만든 햄 등이 맛깔스럽게 진열돼 있다.
냉장고에는 가공육과 맥주가 놓여있고 한쪽에는 콩과 잡곡류, 견과류가 소포장 되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품마다 치비타의 상징인 이 마을 사진이 회사 로고처럼 박혀 있다는 점이다. 사진만으로도 지역에서 생산된 로컬푸드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로컬푸드와 슬로푸드는 그 경계선이 모호하다. 유사점이 많은 이 둘을 굳이 설명하자면, ‘로컬푸드’가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유기농 농산물을 강조)로 만든 음식이라면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에 대비되는 개념의 로컬푸드라고 풀이할 수 있다.
슬로푸드의 출발은 외세 자본의 침입에 대한 반발이었다. 로마에 맥도날드가 진출하자 맛의 본고장이라고 자부했던 이탈리아인들은 ‘전통음식을 소멸시키는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를 반대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슬로푸드운동의 개척자인 카를로 페트리니는 미식(美食)에 대해 말하며 ‘좋은 음식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했다. 그가 말하는 좋은 음식은 최대한 식품 본래의 특징(맛)을 존중하는 것이다. 즉 가공을 배제하고 원재료의 자연성을 그대로 살린 것으로 규정했다. 먹을거리야말로 그것을 만든(수확한) 사람의 문화적 특성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사실 ‘훌륭한 음식’이란 건강한 농업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취재 안내를 맡은 국제슬로푸드연맹 알도 사무장은 “지역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슬로푸드를 만드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별한 가공 없이 시간을 들여 발효시키고 염장하고 말리는 것이 전통의 가공법인데 그것만으로도 음식의 맛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며 “요리 방법이 복잡해질수록, 더 많이 가공할수록 본래 식재료의 맛을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

정직하게 생산해 스스로 즐기는 것
오르비에토와 치비타에서의 식사는 대부분 2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다. 음식을 느리게 즐겁게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안에서 삶을 자족하는 것이 슬로푸드의 원동력이다.
슬로푸드의 특징은 식재료 가공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인 자연 발효와 말리기가 주된 방법이고 인공 조미료 첨가는 거의 없다. 이탈리아의 특화품인 와인과 발사믹이 대표적이며 햄도 그 중 하나다. 햄은 와인처럼 원산지의 명칭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오르비에토에서는 지역의 특산물인 멧돼지와 양고기, 비둘기고기를 맛볼 수 있다. 멧돼지 고기는 보통은 갈거나 잘게 썰어서 파스타에 넣어 먹지만, 대부분은 햄으로 가공해 판매한다. 그래서인지 오르비에토의 많은 정육점과 식당에는 멧돼지를 박제해서 입구에 걸어놓고 있다. 비둘기 또한 역사가 깊다. 비둘기는 수백 년 전부터 지하동굴에서 사육해 식량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동굴 사육을 금지(잔인하다는 이유로 바티칸에서 오래전 금지시킴)하고 있지만, 식재료의 전통은 계속 살려나가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별미로 제공하는 식당이 아직도 많다.

슬로푸드를 맛보면서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신선하다. 간결하다. 맛있다’는 것이다.
샐러드는 신선한 채소에 올리브유와 발사믹 정도만을 넉넉히 뿌려서 먹는다. 요리법도 별다를 게 없다. 버섯을 넣은 파스타는 버섯의 향을 특별히 강조한다. 고가의 송로버섯은 별개로 치더라도 보통의 버섯을 넣은 파스타에서도 특유의 향이 강하고 은은하게 퍼진다. 정리하자면 맛의 이유는 한가지였다. 발사믹과 올리브유, 그리고 버섯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다.

식재료의 기본이 되는 소스를 전통의 방법으로 오랜 기간 숙성해 만들고 신선한 재료를 가미하는 것, 그리고 그 음식을 소중히 여기며 오랫동안 즐기고 맛보는 것, 그것이 이탈리아의 슬로푸드였다. 
 <연합취재단 고양·태안·한산·청양신문 이진수기자>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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