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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글쓰기, 행복한 글 읽기 ‘시집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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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글쓰기, 행복한 글 읽기 ‘시집의 탄생’
  • 김현락 재능기부
  • 승인 2015.11.16 09:57
  • 호수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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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사진첩

복숭아꽃이 피고 진달래 봉오리가 엄울엄울 올라오는 봄이면, 꽃처럼 활짝 피어보고 싶은 어머니들이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꽃보다 더 진한 향기로, 꽃보다 더 오래 오래 피어 있을 수 있는 시를 쓰고 계신 것입니다.
 
숫자라는 놈은/ 참! 아리쏭하다/ 알면 알수록 나를 헷갈리게 해/ 한 자릿수일 때 만만하던 놈이/여러 자릿수일 때 무서울 정도로/ 나를 위협하듯/ 머리속을 혼란하게 한다/ 그게 바로/ 숫자라는 너란 놈이다 - ‘숫자’
 
힘들어 일하기 싫어/ 일하다 와서 밥 해 먹기 힘들어/ 돈도 쓴내가 난다/ 젊어서도 안 하던 일/ 나이 먹어 하려니 정말 힘들어 - ‘힘들어’
 
콩이 잘 영글어 좋았는데/ 어느 날 밭에 가 보니/ 고라니가 다/ 뜯어 먹었네/ 어쩌면 좋아 콩대만 우뚝/일 년 농사 고라니밥 만들었네 - ‘속상해’
 
뙤약볕 고추 딸 일 걱정에/ 조금만 열렸으면 했더니/ 웬걸, 주렁주렁 가지가 부러질 지경/ 영감님 원망하며 따고 말리고 또 따고/ 내 허리도 부러질 지경/ 하지만/ 마이너스통장 잔액 숫자 앞에/ 사라진 –작대기/ 뙤약볕 고생은/ 얼음과자처럼 녹아버리네/ 이 맛에 평생 땀 흘렸지요 - ‘고추따기’

초록색으로 꽉 채운 들판을 보면서 어르신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학습장인 마을회관을 찾아 다녔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은 간식이 부담스럽다 말씀하시는 어르신도 계셨고, 공부하기 싫은데 잘 됐다며 더 놀다가라 하시던 분도 계셨습니다. 또 어느 학습장에서는 공부에 방해된다고 까칠(어르신들께는 사용하기 죄송한 표현이지만)하게 구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물론 환하게 반겨주시는 어르신들이 훨씬 많아서 학습장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즐거웠답니다.
글자를 손으로 살짝 가리시는 어르신, 시 한 편을 소설처럼 길게 읽어 들려주시던 어르신, 곱게 색칠한 단청그림을 자랑하시던 어르신, “씨 유 어갠” 오늘 배웠다는 영어로 인사하시던 어르신….
  
곱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잘 익은 모과 열매를 보면서 어머니들이 쓰신 시를 추수하듯이 걷어 들입니다.
연필을 잡는데 길들여지지 않은 손으로, 손처럼 뭉툭하게 쓴 글자를 보면서 참 많이 행복합니다. 매끈하지 못한 한 획 한 획의 글자만큼이나 구불구불한 어르신들의 살아온 추억을 읽습니다. 실실 웃음이 나오다가 눈물이 나도록 웃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는 코끝이 찡하여져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잘 생긴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학습장.
연둣빛 잎사귀가 어르신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박자박 발소리를 들으며, 툭하면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초록으로, 노랑과 갈색으로 짙게 물들었습니다.
나뭇잎이 자라고 물든 잎이 떨어져 쌓이는 동안
어르신들의 삐뚤빼뚤한 글자로 채워진 공책 역시 쌓여가고, 몽당연필은 필통을 가득 채웠습니다.
곧 감개무량한, 스스로도 자랑하고픈 두꺼운 시집이 출간됩니다.
그날, 느티나무 빈가지 위에 꽃 같은 첫눈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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