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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못다 이룬 연보랏빛 사찰의 꽃 ‘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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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못다 이룬 연보랏빛 사찰의 꽃 ‘상사화’
  • <김현락 프리랜서>
  • 승인 2014.08.25 17:08
  • 호수 10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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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남을 청양의 풍경들

매미가 억세게 울던 어느 여름, 외갓집 토방 밑에 연보랏빛 꽃들이 사방으로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외할머니가 죽어서 저렇게 이쁜 꽃으로 태어나면 얼마나 좋겠냐 하시던 저승꽃이 남양면 신왕리 절 마당 한적한 곳에 은은하게 반짝이며 피어있다.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은 꽃을 생각하지만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 이름 붙여진 상사화는 오래된 꽃밭이 있는 시골집 담 밑이나 굵은 나무밑동, 사찰 화단에 주로 자리를 잡는다. 봄이면 부추 잎보다 넓고 큰, 난초 잎과 비슷하나 더 통통하고 끝이 동그스름한 잎이 올라와 초록색 포기를 만들며 광합성을 하여 알뿌리에 양분을 비축해 놓는다. 그러다가 여름이 시작되면 잎은 이미 시들어 버리고 어느 날 문득 바라보면 땅위에서 사라지고 난 뒤다. 장마가 끝나고 후텁지근한 여름이 한창일 때, 봄에서 여름까지 모아놓은 양분을 꺼내 한 여름 자신의 계절에 맞추어 흔적도 없는 잎 자리에서 다시 어느 순간 쑥쑥 꽃대를 올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 놓는다.

하나하나의 꽃대마다 4~8송이의 큼직한 꽃들이 사방으로 밖을 향해 피어있다. 노란 털신을 신은 발을 쭉 끌어 올리는 앙증맞은 모양인 6개의 수술이 있는 통꽃은 잎의 자취를 찾기라도 하는지, 아니면 본인보다는 남을 위해, 남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피는 느낌으로 달려 한 덩어리를 이루는데, 이들을 보면 그냥 자연스레 발걸음이 멈추어지고 허리를 굽히게 된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소극적인 습관이나 꽃의 이름과 의미가 주로 절에서 많이 피어나는 사연과 일치해 보이지만, 이 꽃이 절에 많은 이유는 상사화 알뿌리에 방부효과가 있어 절에서 필요한 불경을 만들 때나 종이를 붙여 책을 엮을 때 접착제로 넣거나, 탱화를 그릴 때 알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는 것을 방지하므로 옛날부터 항시 곁에 심어두고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홀로 선 꽃대가 수행생활을 하는 구도자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이유와, 세속 여인을 사랑한 스님이 만날 수 없는 여인을 그리워하다 쓰러져 절 마당에 피어났다는, 스님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우던 여인이 수도중인 스님의 방 밖에서 그리움만 키우다 된 꽃이라는 상반된 전설이 꽃대와 꽃잎에 깊숙이 고여 있어, 공부하는 스님들에겐 이성에 대한 감정을 그만큼 조심하라는 의미로 그냥 지나치기에는 슬픈 사연을 지닌 꽃을 절마다 심었다고도 한다.

상사화는 종족번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인 열매를 잘 맺지 못한다. 꽃이 피고 씨방도 생기지만 씨앗이 여물지 않아 알뿌리로 번식을 한다. 식물에 있어서 꼭 만나야 되는 상대는 잎과 꽃이 아니라 수술과 암술이지만 어쩌면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꽃의 의미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조차 전하지 못해 죽어서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는 듯하다. 스스로 씨앗을 만들지 않은 씨방 끝에서 마른 잎만 바람에 흔들린다.

잎 떠난 그 자리에 피어나 꽃을 위해 자리를 내준 잎에 대한 고마움을 사람에게 돌려주는 외할머니의 만물꽃. 고운 연보라 꽃빛을 내는 상사화를 넋 놓고 바라보며, 스님과의 안타까운 연정을 간직한 전설을 생각하며, 이제는 지나간 아렴풋한 추억에 빠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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