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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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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며
  • 청양신문
  • 승인 2000.03.06 00:00
  • 호수 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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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순희 (홍성보훈지청)
얼마전 겨레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사적지를 다녀온 후 그 감회가 새로워 여기 소개하기로 한다.

청양에서 공주 방향으로 국도 39호선을 달리다가 청양군과 공주시의 경계선이 닿아 있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난 2차선 도로를 따라 1.7㎞ 정도 가다보면 높고 낮은 능선이 태고의 신비로 에워싸고 있는 널찍한 저수지가 반긴다.

그 저수지를 정면으로 고색 짙은 기와 지붕의 건물 몇 채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면암 최익현선생의 고택이 있고 영정이 모셔져 있는 모덕사이며, 선생이 68세 되던 1900년 4월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기 위하여 마련한 곳이다.

선생은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여 1906년 11월 1백77일간의 유배지인 대마도에서 아사 순국하시기까지 개화의 모순을 지적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등 척사 사상과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로 하는 삶을 일관되게 살다 가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셨다.

구한말의 혼란한 국내외 정세속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기에 신명을 바치신 선생의 고결한 뜻을 우러르며 영정앞에 삼가 머리숙이니,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 곳 아름다운 산과 푸르른 물에 새겨진 선생의 우국충정이 선명하게 와 닿는 것 같아 눈시울이 적셔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우국 충절의 큰별이 깃들어 있는 이곳 모덕사를 찾아 선생을 추모하며 우리민족에게 유난히도 시련이 많았던 20세기를 되돌아 보고 21세기를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는데 선생의 유훈을 새겨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 아닐까?

끝으로 모덕사 관리사무소에서 내방인을 위해 만든 안내 책자에 잘못된 곳이 몇 군데 있어 다시 만들 때에는 이를 바로 잡아 줬으면 한다.

◇안내책자 중 바로잡아야 할 부분
△1쪽①항; 조선왕조는 망국의 비극을 당하였으니~(1910년8월28일을 8월 29일로 정정해야)
(※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날은 8월 22일이며 공포된 날은 8월 29일임)
△5쪽 다섯째 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을 1905년으로)
△5·8쪽; 사진 설명, 구조 : 목조와즙 ‘맛배’는 ‘맞배’로
△13쪽 23째 줄에서는; ‘1946. 3. 광복 후 임정요원 환국고유 추모제 봉행’이라고 기재하고 2쪽 5째 줄에서는; ‘환국고유제를 올리다 (1946년 4월 23일)’로 적고 있다.
고유제 일자(1946. 3 - 1946. 4. 23)를 음력이든 양력이든 하나로 통일해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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