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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긍정적 생각이 삶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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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긍정적 생각이 삶을 바꾼다’
  • 이순금 기자
  • 승인 2009.01.23 09:38
  • 호수 7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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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 청양군 사회복지과 신숙희 장애인담당
1992년 12월 낯설고 황량하게만 느껴지던 길을 헤치고 청양에 첫 발을 디딘 사람이 있다.
‘청양은 울고 와서 울고 가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귓가에 맴돌 정도로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숨긴 채 그는 2시간 넘게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 왔다. 하지만 17년이 흐른 지금 그에게 청양은 더없이 정겹고 친근한 곳이 됐다. 이번 주는 신숙희 담당(42·청양군 사회복지과 장애인담당)의 살아가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신 담당은 지체3급의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 현재 또 다른 장애를 앓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복지업무를 맡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1992년 12월 낯설고 황량하게만 느껴지던 길을 헤치고 청양에 첫 발을 디딘 사람이 있다.
‘청양은 울고 와서 울고 가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귓가에 맴돌 정도로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숨긴 채 그는 2시간 넘게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 왔다. 하지만 17년이 흐른 지금 그에게 청양은 더없이 정겹고 친근한 곳이 됐다. 이번 주는 신숙희 담당(42·청양군 사회복지과 장애인담당)의 살아가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신 담당은 지체3급의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 현재 또 다른 장애를 앓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복지업무를 맡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힘겹게 시작한 공무원 생활
신 담당의 현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17년 전 공무원 임용당시의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가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대전으로 이사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1992년 공무원 임용 후 대치면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두 돌이 지나면서 소아마비를 앓았고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았어요. 교육학을 전공한 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장애인 단체에서 잠시 일을 했었죠. 그러다 사회복지직 공무원 시험 후 면접을 보는데 ‘운전이 가능한지, 행정직으로 시험을 다시 보라’는 등 다른 사람들이 면접 시 받는 질문과는 다른 질문을 저에게 하더군요.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사회복지 업무를 못할 것 같았나 봐요. 그래서 저는 면허증이 없었는데 있다고 했고 어디든지 다니면서 일할 수 있다고 했어요. 왠지 면접에서 떨어졌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붙었습니다. 그렇게 공무원이 됐습니다.”

합격 후 그는 발령 희망지를 출퇴근이 가능한 대전 근교 공주, 금산, 논산 순으로 적어냈다. 하지만 그는 청양으로 발령을 받았다.
“정말 많은 걱정을 들으면서 청양으로 왔어요. 하지만 첫 발령지인 대치면사무소는 저에게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어 줬고 황량한 곳이 아닌 정겨운 곳 청양을 선물해줬어요.”

가슴에 남은 ‘그 어른의 따스함’
첫 발령지 대치면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낯선 곳이 아닌 따뜻한 기억이 새록새록 쌓이는 곳 청양을 만들어 갔다는 그.
“큰 수해가 난 적이 있어요. 1995년이었을 거예요. 복지담당자들이 피해 조사를 다녔는데, 제가 넘어가야 할 작천리 다리가 수해로 넘쳐흘렀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께서 저를 업어 다리를 건너게 해주셨어요. 또 돌다리를 칠십이 넘은 할머니께서 장화를 신고 업어서 건너 주셨죠. 이런 따뜻한 기억이 많은 곳이에요. 2002년에 군청 사회복지과로 왔는데, 대치면 향우회 모임에 가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저를 대치 사람으로 봐 주셨죠.”

이런 따뜻함 때문에 그는 주변에 사랑의 손길을 나누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전한다.
대치면 근무 당시 따뜻함으로 대해 주던 주민들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사명감과 사랑을 키웠고, 또 그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돌봤다.
면내 장애인을 포함한 어려운 주민 관련 업무를 하면서 지원금이 모자라 제때 혜택을 보지 못하는 노인이 있으면 사비를 털어 돕는가 하면 또 스스로 월급의 1퍼센트를 성금으로 적립해 모자가정을 도왔다.

“어느 책에서 ‘자기 수입의 1퍼센트만 기부하면 세상이 살기 좋아진다’는 내용을 본 적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또 그는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본인이 어렵다’고 하지는 않지만 자녀들 때문에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주민들을 많이 보게 되면서 조심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시작했다.
“제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곳과 연결해드리려 노력했어요. 제가 한 일이라면 갖고 있는 인적자원을 이용해 도움을 받도록 해드린 것뿐이에요. 제가 인복이 많은 것 같아요. 청양에 어려운 분이 있다고 말을 하면 선뜻 도와주는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 덕분에 저도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었고요.”

대치면에 근무하면서 10여 년 간 남다른 열정과 희생정신으로 이웃과 함께한 그는 2001년 행정자치부와 에스비에스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5회 민원봉사상 본상을 수상했다.

40년인데 아직 적응 못했어?
지체 3급 장애를 앓고 있지만 그는 혼자 충분히 걷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5년과 2007년 연거푸 두 차례 수술한 뒤에는 몸에 조금 무리가 따른다고 말한다.
“아픈 다리를 2005년에 수술했는데, 2007년에는 아프지 않은 다리가 꺾여서 수술을 또 했어요. 그러다보니 요즘 스트레칭도 못하겠더군요. 예전에는 혼자 산행도 다니곤 했거든요.”

장애를 앓고 있지만 장애인이라서 불편함을 느낀 적은 거의 없다는 그. 
“친구들이 저를 기억하기를 ‘교장선생님이 가방 들어다 주던 아이’, ‘친구들이 손잡아 주던 아이’로 기억합니다. 그런 환경 때문이었는지 저는 장애를 가졌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그동안은 힘들지 않았다는 그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힘이 들면서, 어느 날 친구 딸에게 ‘이모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단다. 그 말은 “이모 40년 넘게 살았는데 아직 적응 못했어?”라는 호된 꾸지람(?)으로 되돌아왔고, 그는 무엇인가로 머리를 세게 맞는 느낌과 함께 다시 한 번 심기일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아이는 제가 장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처럼 들었나 봐요. 얼마나 혼났는지 모릅니다.”
장애인 관련 업무를 보면서 그는 가끔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고 전한다. 비장애인이 장애 업무를 하고 있으면 직업으로 봐주는데,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장애 업무를 보다보니 ‘본인이 장애인임에도’가 항상 붙는 것이다.
“장애인임에도, 장애인인데 등 편견의 눈으로 보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장애 비장애를 떠나 업무를 하는 것은 똑같거든요. 참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 힘들었지 않았나 싶어요.”

청양이주 16년만에 보금자리 마련 
신 담당이 청양에 처음 왔을 때는 이사한 지 하루만에 집을 비워주고, 또 짐을 풀지도 못한 채 다시 이사를 해야 하는 설움도 당했다. 그렇게 그는 일곱 번의 이사를 다니다가 지난해 드디어 주공아파트를 분양 받아 16년만에 안착했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아요.”

그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항상 바쁘게는 움직인단다.
일은 기본이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그는 독서지도사, 스피치 토론지도사, 통계분석사 등 항상 무엇이든 한다. 자신을 위한 투자다. 퇴직 후 무엇을 할까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단다. 그래서 항상 바쁘다.
“누군가 5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그려지는 것이 없더군요. 그렇다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있어 내가 있다
그의 생활철칙은 ‘내 마음 대로’란다. 또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쁜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너 대신 내가 불편했으면 좋겠다’고 말씀 하셨어요. 또 ‘내 다리를 복제해 너에게 주면 뛰어다닐 수 있을 텐데’라고도 하셨죠. 제가 이렇게 씩씩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저희 어머니 덕이 큽니다. 저를 중학교 때까지 업어서 학교에 등하교 시켜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3학년 덩치가 얼마나 컸겠어요. 그렇게 큰 아이를 업고 어떻게 다니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죠. 청양에도 장애인 부모회가 있습니다. 속상해 하지 마시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직 미혼이다. 그리고 그는 미혼이어서 불편한 것이 있다면, 형광등 달기가 힘들뿐이라고 전한다. 
“욕심이 많아서 결혼을 못하는 것 같아요. 다리가 불편해서 순간순간 잡아줄 많은 손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 담당과 2시간여 대화를 나누면서 기자는 긍정적인 마음과 당당함을 배웠다. 또 미래를 위해 꾸준히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부지런함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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