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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기우제 지내던 용산, 용못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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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기우제 지내던 용산, 용못 기억하세요?
  • 김홍영 기자
  • 승인 2008.12.29 10:48
  • 호수 78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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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자연마을과 주민숙원사업: 장평면 구룡리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화산에서 장평쪽으로 가다보면 장평들판 한켠에 사발 하나를 엎어놓은 듯 솟아오른 곳이 있다.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용산이다. 장평면 구룡리 구룡말의 용산은 마을 이름의 유래를 담고 있는 곳으로 구룡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정철교(58) 이장은 용산이 주민들의 삶의 애환과 추억을 간직한 친근한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 어려서는 여기를 매일 올라오다 시피 했어요. 소나무가 많고, 용산 밑으로 큰 둠벙이 있어서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용산에 올라 아래를 보면 용못이 보이고, 아래서 용산을 올려보면 소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어우러진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용못이 꽤 깊어서 어린아이들은 바위에서 못으로 뛰어 내리며 놀곤 했고 어른들에게도 여름날 시원한 피서지였지요.”

경치 좋은 용산은 인근 초등학교 소풍지로 자주 이용되었으며 운치가 있어 주민들에게도 사랑받던 곳이다. 정 이장의 말처럼 용산과 용못은 주민들에게 좋은 휴식 공간이면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칠갑산에서 시작된 지천이 금강물과 합쳐지기 전 마지막으로 흘러가는 곳이 구룡리다. 마치 용틀임을 하듯 용산의 바위 절벽을 휘돌아 물이 돌아나가는 곳에 용못이 있다. 용못에는 미처 하늘로 가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용산과 용못은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를 짓던 이들에겐 자신들의 염원을 간직한 소중한 존재였다.

마을 곳곳 역사의 흔적 간직
“수리시설 없을 때는 천수답이라 기우제를 많이 지냈지요. 60~70년대 가뭄이 심할 때는 부여, 은산 사방 각지에서 기우제 지내러 여기로 왔어요. 여자들이 풍물치면서 물병 메고 와서 떡 시루 놓고, 비가 오라고 기우제를 지냈지요.”
주민 윤상철씨(81)는 기우제는 가뭄에 목이 타들어갈 때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주는 마음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70년대 말 수리 시설이 생기면서 기우제도 지내지 않게 되었고, 80년대 중반 경지정리를 하면서 용못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제방 둑 막으면서 물길이 물러나고, 둠벙이 그 때 많이 메꿔졌어요. 경지정리하면서 용못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흔적이라도 남겨 놓자는 생각으로 다 메꾸지 않고 지금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지.”
구룡리 사람들에겐 귀한 존재인 용못이 이제는 이전에 비해 그 흔적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주민들. 최근 마을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우제를 다시 지내자는데 뜻을 모았다.
“기우제를 다시 지내려면 우선 용못을 복원하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3년 전에 복원을 위한 조사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 이장은 용못 복원에 드는 비용 문제로 어려움이 많다며 용못이 복원되어 주민들에게 위안을 주던 존재로 다시 돌아오기를 고대한다고 덧붙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구룡리에서 그 흔적을 또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들말이다.  용산을 내려와 정 이장과 찾은 들말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입구에서 오가는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성황나무입니다. 도로가 날 때 베어 없어질 뻔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다고 합니다.”
3백년이 넘는 큰 느티나무는 여전히 들말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건재하여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옆에는 기계유씨라는 글씨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어 들말에 터를 잡고 살던 이들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원래는 일곱 개가 함께했던 칠성바위였는데 현재는 4개만 남아있다. 
넓은 장평들의 곡창지대에 자리한 구룡리는 현재 180여 명이 살고 있어 한 마을 단위로는 인구가 많은 편이다.

“우리 마을이 다른 마을에 비해 큰 마을이지요. 농사지을 너른 땅이 있고, 자연마을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모여 있는 집단마을로 살기에 좋은 마을입니다.”
주민들은 마을이 너른 평야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니 사람들 농사짓고 살기에 좋은 땅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주민들의 성실함이 더해져 구룡리가 살만한 마을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원래 들녘 사람들인데 예전에는 우리 마을 사람 소유의 농토가 많지 않았어요. 주로 외지 사람들 소유의 땅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노력해서 거의 찾았어요.”

주민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선 내 땅을 갖고 농사를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열심히 일한 덕에 이제는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 점이 구룡리가 예전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이라고 말한다. 또한 벼농사를 짓던 주민들은 20여 년 전부터 수박, 멜론 등의 하우스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 형편이 나아졌다.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시작한 하우스 농사로 인해 농한기 때도 구룡리 사람들은 바빠졌다.
“일거리가 많으니까 좋지요. 마을에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정 이장이 건네는 헤어짐의 인사에 생동감이 담겨있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많아도 마을의 오랜 전통만은 변하지 않고 이어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떠났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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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2008-12-29 17:45:35
이장님 이름이 정철교 인데 오타가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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